전북스토리

전라도관찰사 이상황, 1811년 4월 초파일 전주 오목대에서 관등놀이를 하다

이종근의 행복산책 2025. 5. 8. 21:11

전라도관찰사 이상황,  1811년  4월 초파일 전주 오목대에서 관등놀이를 하다

전라도관찰사 이상황(李相璜, 1763~1841)이 1811년  4월 초파일 오목대에서 관등놀이를 한 기록이 확인됐다.
'호남일기(湖南日記)'는 이상황이 1810년(순조 10)부터 1812년(순조 12)까지 전라도관찰사로 재임했던 시기에 쓴 관직일지이다. 
이 기록은 이상황이 전라도 관찰사가 된 1810년 6월 23일 이후 전주감영에서 업무를 시작한 7월 27일부터 1812년 3월 9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조상들은 옛 부처님 오신날의 풍경을 그림으로도 남겼다. 
‘진북사 관등(鎭北寺 觀燈, 88.0×58.0cm, 종이에 채색, 개인 소장)’은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 1841~1910)의 조선말기-근대 그림이다. 그는 진북사의 관등을 그렸으며, 화제는 청포(靑圃) 이광묵(李光默)이 썼다. 도서 밑 한문을 보면 ‘청포필 석정화(靑圃筆 石亭畵)’로 익힌다.

세필로 쓰인 한자를 한글로 바꾸면,

‘진북사 관등
만 길 깍아지른 절벽
한 칸 고요한 절집
향기 어리어 부처님 신령해도다
목탁 소리 그 속에서 은은하게 퍼져나간다’

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였던 이정직은 전주 진북사의 연등회를 수묵화로 묘사하고 있다. 부처님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 손에 사각등을 들고 등불을 밝히려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모습, 절 마당에서 놀이를 하거나 담소를 나누는 모습 등 부처님오신날을 즐기던 당시 아낙과 사내와 아이들의 삶이 토속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부처님오신날을 즐기던 모습이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게 표현돼 있다.
초파일이 다가오면 꿩의 꼬리로 꼭대기를 장식하고 채색 비단으로 깃발을 만들어 단 기둥을 마당에 세운 다음 줄을 매어 등을 달 준비를 해 둔다. 그리고 초파일 저녁에 이 줄에다 등을 매달고 불을 켠다. 관등
(觀燈) 놀이에 사용되는 등은 일월등, 수박등, 거북등, 오리등, 배등, 북등, 연꽃등, 학등, 항아리등, 칠성등 등으로 종류가 수없이 많으며, 모양이나 색깔도 매우 다양하다.
현등(懸燈)하는 집이 많아 거리가 밝아져 사람들이 밤새도록 거리를 돌아다녔다.
초파일의 현등은 민가와 사찰의 내용이 조금 다르다. 각 가정에서는 등간(燈竿)이라 하여 마당에 긴 장대를 세워 등대를 만들고 꼭대기에 꿩의 꼬리털을 꽂아 장식하고 오색비단의 깃발을 늘어뜨린다. 꿩의 꼬리는 길상(吉祥)을 뜻하는 것으로, 우리 민족은 농기(農旗)의 꼭대기에도 흔히 이것을 꽂았다.
관등놀이의 경우, 등불이 환하게 밝을수록 길(吉)하다 하여 부잣집에서는 큼직한 양초를 켜기도 했으며, 가정에서는 아이들 나이대로 등을 달면 좋다고 해서 여러 개를 달았다. 등은 높이 달고 많이 달수록 자랑으로 여겼다.
이처럼 등을 밝히는 것은 자비와 광명으로 중생들을 깨우치려는 뜻이 담겨 있다.
또, 초파일에 각종 민속놀이도 함께 행해졌다. 등의 불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등놀이’, 꼭두각시를 만들어 옷을 입혀 매달아 놓고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놀이, 종이에 화약[숯가루]을 싼 다음 새끼줄로 높이 매어 달고 불을 붙이면 불꽃을 튀기면서 타 올라가는 ‘줄불놀이’ 등이 행해진다.
'1811년 4월 8일. 맑음 전주 선화당에 머물며 첩소를 체결했다. 날이 밝자 감사가 견여(肩輿)를 타고 붉은 색 공복 '홍관대(紅冠帶)' 차림으로 객사에 나아가 '사장관대도회백일장(四長官大都會白日場)'을 설행했다. 옥과현감 이명운(李鳴運), 동복현감 송운재(宋雲載)가 각자 임소에서 달려와 공장을 바치고 입알해 문안했다. 시관(試官)인 익산군수, 임피현령, 진안현감, 고산현감이 함께 입알해 문안하고 그대로 과거시험장을 열었다. 저녁 때 합격자를 발표한 후 감사사 견여를 타고 겉에 입는 표의(表衣)를 입고 관등(觀燈)을 하기 위해 오목대(五目臺)에 나아갔다. 영암군수 이상일(李商一), 남평현감 이방억(李邦憶)이 각자 임소에서 달려와 공장을 바치고
입알해 문안했다. 수령들이 또 문안하고 나갔다. 잠시 풍악을 울리고 밤이 되어서 감영으로 돌아왔다'
이는 초파일에 감사가 참관해 관등놀이가 오목대에서 이루어졌음을 시사해준다.
오목대 한자 표기가 梧木臺가  아니라 五目臺로 되어 있다.
1811년 윤 3월 4일의 기록에도 오목대가 나온다.
 '감사가 견여를 타고 소군물(小軍物), 전배군(前排軍)으로 오목대(五目臺)에 나아갔다. 전주판관, 중영장이 문안하고 종일 풍악을 울렸다. 저녁에 감영으로 돌아왔다'
'만마관지(萬馬關址)'는  남원에서 완주군으로 들어가는 호남제일관문(湖南第一關門)으로 조선 후기 순조 때 축성된 석성의 터이다.
'완산지(完山誌)'의 ‘1811년 이상황이 부(府)의 동남(東南) 7리(里)에 만마관을 축성했고, 1813년 관찰사 박윤수(朴崙壽)가 견훤고성지(甄萱古城址, 현 남고산성(南固山城)]에 산성을 축성하고 진(鎭)을 설치했다’라는 기록과 '국조보감(國朝寶鑑)' 제79권에 ‘전주부(全州府)에 남고산성을 쌓고, 진을 설치하고 별장(別將)을 두었다. 성은 만마곡(萬馬谷)에 있는데, 남로(南路)의 요충지에 해당하고 전주의 요해처(要害處)가 되는 곳이다. 
전라관찰사 이상황이 계획하고 쌓기 시작했다. 이때 이르러 완성되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1813년에 완공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1868년에 간행된 김조순(金祖淳)의 문집 '풍고집(楓皐集)'에서 만마산성 신축기(新築記)가 소개되고 있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고종 10권, 1873년에 ‘전주부 만마관 등의 공사에 자금을 헌납한 진제필(陳濟弼)을 변경 장수에 임명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이때 만마관의 중축 또는 개축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완주 위봉산성 안에는 어진을 모시기 위한 행궁을 두었다.  이상황이
1808년 중수(重修)했다.
그는 1811년 5월 22일에 억경대에 올라 남고산성을 바라보았다.
그는 1812년 1월 18일 새로 축성한 남관산성 성역소(城役所)에 가서 한나절을 두루 살펴보았다.
2월 7일 견여를 타고 인신(印信), 병부(兵符), 소군물(小軍物), 전배군(前排軍)으로 남고사(南高寺)에 가서 새로 축성하는 산성 성터를 두루 살폈다.
남고사 한자 표기가 南古寺가  아니라 南高寺로 되어 있다. 
2월 18일에 식후에 감사가 말을 타고 남고사(남고산성) 성역소(城役所)에 이르렀다. 3월 6일 식후에 감사가 큰 말을 타고 슬치(瑟峙)에 이르렀다. 임실현감 윤응열(尹凝烈)이 임소에서 달려와 공장을 바치고 입알해 문안하고 하직하고 나갔다.
남고사(南高寺)에 이르러 잠시 쉰 후에 감영으로 돌아왔다./이종근, 도움말 이상황의 호남일기(이동희 역주, 전주시. 전주문화연구회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