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스토리

‘변산은 해학(海嶽)으로 나라에서 이름이 났다’ 김종수 '연재 송병선의 '유호남기(湖南記)연구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전북학연구 제14집에 게재...지리산북록기(남원), 도솔산기(고창), 변산기(부안), 덕유산기(무주) 등 소개

이종근의 행복산책 2025. 5. 6. 16:55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은 19세기 후반의 뛰어난 유기문학가(遊記文學家)이다. 그는 22편에 이르는 유기문학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호남 유산기는 '연재집(淵齋集)' 권21, 22에 실려 있다.
19세기 후반을 활동기로 삼았던 연재 송병선은 우암 송시열의 9세손으로, 아우인 심석재 송병순과 함께 연재학파를 창시·공유한 홍유이자 우국지사다. 송병선은 평생토록 독서와 강론·강학·저술 활동에 주력한 산림형의 재야 유학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송병선은 강론·강학 활동에 뒤이은 저술과 관직 진출에의 저울질로 요약되는 생애 세 번째 단계인 학문적 심화기에 진입한 이후로, 전국의 명산을 찾아서 본격적으로 유람에 임한 사실이 주목된다.
그중에서 1869년(39세)에 호남의 산수를 심방하고 남긴 '유호남기'의 경우, 송병선이 찬한 22편 유기의 평균적인 면모를 간직하고 있을뿐더러, 과거 이 지역의 산수의 실경과 역사적 상관물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김종수 세명대학교 교양학부 강사의 '연재 송병선의 '유호남기(湖南記)연구전북지역을 중심으로'가 전북학연구 제14집에 게재, 지리산북록기(남원), 도솔산기(고창), 변산기(부안), 덕유산기(무주) 4편을 살펴본다.
'변산기(邊山記)'는 1869년(고종 6)에 개항기 순국지사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이 부안의 변산 지역을 여행하고 기록한 기행문이다.
'변산기'는 산세와 빼어난 경관, 산속 사찰과 누대 등 산에 대한 정보를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으며, 자신이 기대했던 모습에 미치지 못할 경우에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예컨대 월명암 월정대를 김시습이나 이정구는 금강산과 지리산에 비유하고 있는데, 송병선은 이런 극찬은 지나친 것 같다고 하는 서술 등이 이에 해당된다.
또, 변산 경관을 통해 도학자로서 송병선의 사상을 드러내기보다는 장소의 이동에 따라 보여지는 광경들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기록하고 있다.
송병선이 남긴 호남 유산기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구한말 호남의 명산에 대한 인식과 특징을 밝혀내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변산기'에 묘사된 부안 직소폭포의 아름다움은 직소 폭포 일원이 2020년 4월 20일 명승 제116호로 지정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됐다.
송병선은 '변산기'에서 다른 어떤 곳보다 직소 폭포 주변 풍경에 대해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묘사하고 있는데, 그 아름다움이 ‘설악산의 구룡폭포, 개성의 박연폭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유산기는 첫 부분에서 유람 동기, 본문에서 유람의 견문과 감상, 마지막에 유람을 마치며 하산하여 귀가하는 내용이나 유람 지역의 전체적인 감상, 혹은 유람 당시를 회고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변산기'역시 비슷한 구성을 보이고 있는데, 마지막 부분에는 변산 유람을 마치고 정읍과 전주로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 유람 내용을 회고하며 기문을 짓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송병선이 1869년에 변산의 칠성암(七星菴), 우금암, 실상사, 직소 폭포, 월명암, 월정대, 채석강과 적벽강, 내소사를 차례대로 유람하고 그 견문과 감상을 서술해 놓고 있다.
먼저 송병선은 변산을 유람하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다. 변산이 ‘소봉래(小蓬萊)’라 불리며 동봉(東峰) 김시습(金時習,1435~1493)과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가 모두 금강산과 지리산으로 논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변산의 승경을 찾아보고 싶어서 변산을 유람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본격적인 유람을 시작하며 그 이동 경로에 따라 견문과 감상을 서술한다.
처음 일행은 칠성암을 지나 개암사에 도착해 점심을 먹는다.
이후 북쪽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우금암에 이르렀는데, 우뚝 천 길로 솟아 있는 굴에 전해 내려오는 소정방과 신라 법민왕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북쪽 방향으로 산허리를 굽이굽이 돌아 실상사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가 직소 폭포에 닿는다. 우레처럼 울리고 그 높이가 수십 길이인 직소 폭포에서 물거품이 날려 얇게 뿜어내는 모습, 검푸르고 깊은 소(沼) 등을 보며 일행들이 ‘기이한 장관’이라고 소리친다.
다시 돌계단을 부여잡고 끝없이 벼랑을 따라 걸어가 도착한 곳이 월명암이었다. ‘안온하면서도 기이한 절경’이었다.
월명암 위로 다시 올라가 가장 높은 월정대에 닿았는데 ‘사람의 정신이 높이 우주 밖까지 날아오르는 듯하다.’고 탄상하고 있지만 금강산과 한라산의 경관에는 못 미친다고 했다.
그날 밤 월명암 요사채에서 묵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지지포를 지나 층층이 절벽을 묶어 세워 둔 듯한 채석강을 구경하고, 붉은빛으로 기이하고 웅장한 적벽을 구경한다.
이어 내소사로 와서 절을 둘러보고 내소사 오른쪽으로 올라가 청련암과 사자암 두 암자를 방문한다. 마지막으로 산을 내려오며 일행들과 작별하고 정읍으로 떠나가는 내용이다.
그는 '지리산북록기'에서 “실상사에 도착하니 절은 평지에 있고 큰 개울은 푸르게 둘러져 있다. 불당은 높게 솟아 100척이나 되는데 단층으로 되어있다”고 했다. 그러나 1883년 양재묵 일당이 실상사의 땅을 차지하려고 절에 불을 지른 바람에 장엄했던 전각은 사라져 버렸고 벌판에 전각 3동만 남았다고 한다.
고창 '도솔산기'를 남겼다.
'저녁해가 다그쳐서 선운사에 투숙했다. (사찰의) 얼개를 엮어 만듦이 웅장하고 화려하고, 금빛과 푸른빛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평평한 땅을 산이 에워싼 탓에, 자세하게 볼 수 있는 바가 없다. 오직 동백(冬柏)만이 싱싱하게 푸르러 정취를 자아낸다....(중략)... 또 꺾어서 위로 3~4리를 오르니, 도솔암과 마주쳤다. 바위에 기댄 채 골짜기를 굽어보고 있는데, 맑고 아득해서 속진[塵]을 끊은 듯하여, 여기서 조금 쉬었다'
도솔암 묘사가 선운사 분량에 미치지 못한 것은, 암자 건물에서 특별한 관찰 포인트를 더는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대신에 앞의 약수암과 위의 도솔암 묘사에서 확인되듯이, 송병선이 사암 묘사에 주력한 이면에는 흥진(紅塵)이 난무하는 인간 세상과는 사뭇 다르게, 절진(絶塵)의 운치를 가슴 가득히 느낀 데서 촉발되었을 것임이 간취된다.
고창의 상도솔(上兜率)에 올라 접한 상·중·하 세 층으로 이뤄진 대(臺) 가운데서 상층(上層)의 장관을 묘사한 '도솔산기'를 통해서도 거듭 확인되고 있다.
'상층은 극히 펀펀하고 넓어서, 마치 커다란 경연석[筵席]을 펼쳐놓은 듯하다. 또 여타의 기이한 모양의 봉우리는 가파른 낭떠러지로, 빙 둘러 서 있는 모습이 마치 깃발을 벌여놓은 것 같다. 경계(境界)가 엄숙하고 무시무시하여 (절로) 넋[魄]이 움찔해진다. 한 산의 진면목[面目]과 정신(精神)이 죄다 이곳에 모여진 것이, 참으로 기이하고 절묘하니, 겪어 지내 온 것에 비할 바가 없다'
위의 인용문 또한 상도솔 상대(上臺)의 실경에 대한 비유적 묘사와 함께, 산을 사람의 '면목·정신'과 유비시킴으로써, 인간학의 지평으로 유인하는 서술기법이 재현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송병선은 윗글에 곧장 이어서 “흔연히 마음이 흐뭇해져, 감홍로(甘紅露)를 가득 잔에 따라 마셨다"는 사실도 밝혀 두었다. 이 대목은 앞서 적벽에서 “이에 술잔을 끌어당겨서 취하고, 돌을 베개 삼아 잠들어" 운운한 장면과 함께, 송병선이 유람 도중에 음주를 매우 즐겼던 정황을 방증해 준다.
송병선은 '덕유산기'의 마지막에 '덕유산은 온산이 순전히 흙으로 되어 있으며 바위가 적어 별로 기이하고 뛰어난 경치가 없다.
다만, 후장(厚莊)하고 단엄(端嚴)한 모습이 뭉쳐 있어 덕이 있는 것 같았다'는 소회를 적고 있다. 덕유산을 선비들이 즐겨 찾는 이유를 '후덕한 군자의 덕'에 비유한 것은 이 산이 '은자가 머물러 살기 좋은 곳'이라는 의미로 여겨진다. 곧 난세에 선비가 그리워하는 산이 덕유산이다.
한편 19세기 대표적인 도학자이자 유기(遊記) 문학가인 송병선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행되자 이를 반대하며 자결한 인물이다. 그는 송시열(宋時烈)의 9대손으로,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이다. 송시열, 권상하, 한원진 등의 기호학파 학통을 이어 19세기 후반 연재학파를 형성했다./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