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스토리

전주 오목대, 언제부터 존재했나, 그 기록을 찾습니다

이종근의 행복산책 2025. 2. 25. 19:13

전주 오목대, 언제부터 존재했나, 그 기록을 찾습니다

당신은 전주 오목대 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당신은 전주의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나.

'전주 오목대, 언제부터 존재했나. 그 기록은 있기는 하는가' 

 어제 지인이 이종근에게 물어보았다.

‘뒤의 오목대를 나는 매양 오른다. 허술한 주필각은 외로이 서있으며 즐비한 몇만 가옥이 내려다 다 보인다. 그 옆의 자만동(滋滿洞)은 목조의 고적지요. 그 뒤의 발산(鉢山)은 이르노니 발이산(發李山) 과연 그 오백 년 왕기가 여기 결인(結因)했던가’

가람 이병기선생이 읊은 오목대(梧木臺)가 보인다.

'여지도서(전주)'에 “발산 아래에 오목대가 평평하게 펼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완산지(完山誌)'엔 “발산(鉢山) 아래에 있는 돈대이다. 평탄하게 펼쳐져 위에서 전주성을 아래로 굽어보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이곳에 오동나무가 많아서 언덕의 이름을 오목대라 했다는 지명 유래를 싣고 있다.

그렇다면 오목대가 언제부터 있었나.

오목대와 이목대는 1974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경기전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 흙으로 성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는 언덕(발이산ㆍ발산, 관목대)이 바로 오목대이다.

예전에 미목대(眉目臺) 또는 어목대(於穆臺)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왕조의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3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로 있을 당시 군사를 이끌고 잠시 머물렀던 장소라고 전한다.

고려 우왕(禑王) 6년(1380) 금강으로 침입한 왜구가 퇴로를 찾아 남원으로 내려오자 이성계가 이들을 맞아 운봉(雲峰)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는 길에 오목대에서 개선 잔치를 베풀었다고 전할 뿐이다.

여기에는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라는 제액(題額)을 쓴 비석이 세워져 있어 조선 왕조를 일으킨 태조 이성계를 기념하기 위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이 비는 1900년에 세워진 것으로 앞면의 제액은 고종이 직접 쓴 글씨이고, 뒷면의 글은 고종이 짓고 김영목(金永穆)이 쓴 것이다.

 1750년 만든 '해동지도(海東地圖)'와 1861년 김정호가 만든 '동여도(東輿圖)'엔 오목대(吳穆臺)로 표기되어 있다.

오목대의 맞은편에는 이목대(梨木臺)가 있고 그곳에도 비석이 있다.

고종의 글씨인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제액이 기록되어 있다.

1900년 이곳이 목조가 살았던 터임을 밝히고 비문을 세우게 했다. 비의 전면은 고종이 친히 소전(小篆)으로 , 음기는 조병필이 해서로 각각 썼다. 

이곳은  조선 태조의 5대조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출생지로 전하여 오는 곳이다.

‘여지도서’ 전주 산천에 "발산은 관아의 동쪽 3리에 있다. 경기전의 지세에 으뜸이 되는 산줄기다. 민간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 목조의 집이 이 산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고 실려 있다.

이성계 집안은 본관인 전주에서 대대로 살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李翰) 공 이후 목조에 이르기까지 누대에 걸쳐 이곳에서 살았다.

그런데 훗날 목조로 추존된 이안사가 20세 무렵 관기(官妓)와 얽힌 문제로 지방관과 다투면서 170가구를 이끌고 삼척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주에서 불협화음이 있었던 관리가 공교롭게 강원도 안찰사로 부임하자 일행은 다시 함길도 덕원으로 옮겨간다. 이성계가 함경도 사람으로 알려진 이유다.

 삼척을 일종의 도피처로 삼은 것은 이양무와 이안사의 부인이 모두 삼척 이씨라는 것과 관계가 있다. 일대는 삼척 이씨의 세거지(世居地)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안사가 살았다던 집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삼척으로 이주할 때  일가 모두가 그를 따라갔다고 한다. 

집터를 알 만한 사람이 모두 떠나 버린 것이다. 그 후로 4대가 흘러 이성계가 조상들의 고향이라고 찾아왔지만 집터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조금 높은 대지 위에 '이씨인 목조가 살았던 터'란 뜻의 이목대(李穆臺)를 설치했다. 

더욱이 1986년 도로확장공사로 현재 위치로 이목대 비각을 이전했으니 더 더욱 알 수 없다.

비각(碑閣)은 원래 오목대의 동편 높은 대지 위에 있었으나 도로확장공사로 이곳에 옮겨 세웠다.

전주의 대표적인 인물이 목산 이기경(李基敬·1713-1787)이 아닐까 싶다. 

전주 오목대(梧木臺) 아래 산다고 하여 아호를 '목산(木山)'이라 붙인 한옥마을 선비정신의 원조격이다.

영조때 주로 활동한 목산은 전주 출신으로 몇 안되는 고위 관료이자 학자였다. 지금도 3백년가 라고 하며 후손들이 살고 있다.

오목대 인근 자만동에 '오대사(梧臺祀)'가 있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주벽은 운강 유항이며, 죽오 이지익, 유계 이후태, 송암 송은서를  배향했다가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사라졌다.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오목대가 기록상에 언제부터 있었는가는 아직도 연구의 대상이다.

*작품:정인수 화백의 오목대

*지도:서울대 규장각 소장의 1872년 채색 지도를 보면 왼편에 성황사와 적취정과 오른편에 오목대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지도:광여도 전주목' 지도에는 이목대가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