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사람들

'초록빛으로 물든 캔버스....생명과 영원성에 대한 동경' 류재현, '복합문화공간 누에'에서 개인전

이종근의 행복산책 2024. 12. 18. 14:26

2024누에전시 류재현 보도자료.hwp
0.08MB

류재현 작가가 24일부터 다음달 5일까지 완주군 용진면 완주군청 옆에 '복합문화공간 누에'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이 자리엔 50호에서 500호에 이르는 대작 위주의 유화작품 20 여점이 전시된다.
그의 작품 속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의식과 시각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 인간에 의해서 훼손되고 변질돼 버린 자연의 원상회복과 황폐하고 마멸된 인간 심성의 근원 회복이 동시에 맞물려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단순한 대상의 이차적 묘사나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모두 늘 그리워하고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의 대상, 잃어버린 어머니의 가슴인지도 모르겠다. 자연에 대한 신앙과도 같은 열정이 화면 속에 육화된 생명력으로 재탄생되는 순간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의 그림 속 주된 배경은 숲이다. 숲속을 ‘소요’하며 온몸으로 지각한 초록빛 숲의 미세한 떨림마저 놓치지 않으려고 세필을 이용하여 묽게 희석한 유화 물감으로 수묵화를 그리듯 가볍고 부드럽게 표현하고 있다.
숲은 어둠의 본성을 품고 있다. 그래서 먼저 캔버스의 바탕을 숲의 가장 어두운 공간으로 칠한다. 그 칠해진 검은 바탕 위에 한겹 한겹 빛을 향해 쌓아 올리며 숲을 그려 나간다. 생명의 빛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본능적 몸부림이기도 하다.
작가는 서양의 자연주의 화가처럼 두터운 중량감과 투박한 붓 터치가 아닌 숲과 길을 주제로 생명에 대한 경외와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풍성한 공간감을 풀과 나무 그리고 같이 공존하는 새소리와 식물들을 아련한 빛이 비치는 사실적 풍경 속에 담아 ’생명의 숨결’을 주제로 표현한 유화를 선보인다.
작가는 밝은 빛과 잔잔한 붓 터치, 유려한 선과 색채의 조율을 통해 궁극적으로 숨 쉬는 자연을 구현한다. 녹색이 주조색인 것은 주로 녹음이 우거진 숲, 강변의 풀숲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거주지 인근이나 여행에서 발견한 자연 풍경으로부터 출발해 인간과 대등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일정 정도 거리를 둔 채 자연을 관조하고자 하는 작가의 시선이 반영된 결과다. 섬세하게 반복적 터치를 이어가는 그의 방식은 잎사귀 하나하나에 깃든 생명감에 주목하는 지점들은 작가 자신의 근본 태도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100가지 넘는 초록을 사용했다는 화가 루소만큼이나 다양한 녹색 스펙트럼의 변주를 통해 그의 화폭은 때론 빛바랜 사진처럼, 때론 꿈속 장면처럼 펼쳐진다.
작가는 길을 그린다. 그에게 길은 길 자체이면서, 동시에 무엇보다도 삶의 은유이며, 삶에 대한 작가 자신의 태도를 반영하고 드러내는 구실이다. 한마디로 길은 삶의 상징이며 존재의 상징이다. 작가가 길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제자의 죽음이 그 계기이며 동기이다. 학교와 집 사이를 오가는 도로 위에서 제자가 죽었다. 작가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늘 다니던 그 길 위의 풍경은 온통 네거티브(음화, 陰畵 현상된 필름 같은 상태)로 보였다. 세상은 졸지에 낯설게 보이고 네거티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인정하기 싫은 심리적 현실을 대리하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그 이후 길을 그리게 된다. 삶을 살아가면서 맞닥트리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일들을 그리기로 한 것이다. 처음부터 작가에게 길은 길 자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사건이 일어난 실재하는 장소였고, 그 사건을 흔적으로서 기억하고 있는 구체적인 실체였다.
길은 구체적인 사건과 연동된 것인 만큼 그 실체가 뚜렷했다. 그러나 현재의 그림들 속에서 길은 비록 없다고는 할 수가 없지만 그 실체가 상대적으로 암시적이다. 그림들을 보면 길보다는 그 속에 길을 품고 있는 숲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세세하고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서 언제 어디선가 가본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어둠이 품고 있는 숲과 어둑한 초록을 부드럽고 따스하게 감싸는 빛, 투명하게 하늘거리는 나뭇잎들 사이로 흐르는 바람의 질감과 대기의 기운이 감지될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이다.
작가에게 숲은 인간의 인식이 가 닿을 수 없고 인간의 지식으로 해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숲을 그린다. 그 숲은 마치 한 땀 한 땀 수놓듯 일일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세세하게 그려진다. 숲 그림이 살아있는 숲의 본성을 향유하게 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그 길을 걸으며 본성에 대해서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준다.
작가 노트를 통해 "내가 시종일관 사실적 풍경을 그리며 전통적 붓질을 통해 그리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련한 빛이 비치는 사실적 풍경 속에는 누구나 언젠가 경험하고 감각했을 어떤 순간의 기억들이 담겨 있다"고 했다.
김보라 홍익대 회화과 초빙교수는 “작가는 그림을 통해 풀잎 하나하나가 지닌 존재의 소중함을 표현함으로써 기후 위기의 시대에 위태로워진 생명 가치의 문제를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며 “나무, 들풀, 야생화의 생명력, 소소한 자연 풍경 속에 얼마나 큰 가치가 존재하는지, 디지털 매체가 일상을 지배하는 시대에 사라지고 있는 손의 온기, 자연의 오묘한 기운, 잔잔한 에너지를 전달하고자 한다”고 했다.
작가는 "나는 언제나 눈앞에 펼쳐지는 푸른 숲이 좋다. 녹색의 향연이 좋고 나뭇잎과 흙냄새를 이리저리 싣고 다니는 바람의 흔적이 좋다. 당초문마냥 이리저리 뻗은 칡넝쿨, 키 넘게 훌쩍 자란 들꽃과 숲길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생명과도 같은 그 영롱한 햇살이다"고 했다.
이어 “나의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와 작품의 생명들과 함께 호흡하며 일상의 따뜻한 위로와 행복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작가는 전주 출신으로, 전북대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홍익대 대학원 회화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전북미술대전 특선, 전국온고을미술대전 최우수상, 전라미술상 등을 수상, 현재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