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50> 전주에 흐르는 비파명인 송경운의 예술혼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50> 전주에 흐르는 비파명인 송경운의 예술혼
'송경운전(宋慶雲傳)'은 17세기의 비파 연주자 송경운(宋慶雲)을 한문 산문으로 표현, 한국의 문학사와 음악사에서 공히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작가인 서귀 이기발(李起浡, 1602~1662)은 송경운을 실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경험을 바탕으로, 이 빼어난 음악가의 생애를 재현했다.
‘송경운전’은 이기발의 후손들이 유고를 모아 책으로 꾸민 ‘서귀집’(西歸集)에 실렸다.즉 '서귀유고’(西歸遺藁) 권7이다.
'예술인들의 지극한 경지를 칭찬할 때 ‘어째 송경운의 비파 같네’라고 했고, 초동이나 목동의 무리가 모여 놀 때도 누가 재미있는 말을 하면 ‘어째 송경운의 비파 같네’라고 했으며, 말을 배우는 두어 살짜리 아이가 자기와 관계없는 것을 가리키며 물어도 ‘어째 송경운의 비파 같네’라고 했다.
서귀는 송경운이 당대 얼마나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예술인들의 지극한 경지를 칭찬할 때 ‘어째 송경운의 비파 같네’라고 했고, 초동이나 목동의 무리가 모여 놀 때도 누가 재미있는 말을 하면 ‘어째 송경운의 비파 같네’라고 했으며, 말을 배우는 두어 살짜리 아이가 자기와 관계없는 것을 가리키며 물어도 ‘어째 송경운의 비파 같네’라고 했다. 송경운이라는 이름이 알려진 게 대개 이러했다’
이기발은 전주에서 나고 자란 사대부 문인으로, 20대 중반이던 1625년부터 10년 남짓 서울에 거주하며 공부와 벼슬살이를 했고 1636년 병자호란 이후로는 모든 관력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낸 인물이다.
한편 송경운은 1580년대 중, 후반의 서울에서 이담(李憺, 1567~1644)으로추정되는 종친(宗親)의 노비로 태어났고, 임진왜란을 거치며 면천한 이력을지니고 있다.
그는 50대 중반까지 악사로 활동하며 서울과 그 인근에서 대단한 명성을 누렸으나 정묘호란(1627)을 계기로 전주에 이주, 향년 73세로타계할 때까지 20년 남짓의 여생을 보냈다.
송경운의 생애를 추정하게 된 데는 이기발의 아우 이생발(李生浡)이 수군절도사 이담의사위였던 점이 단서가 됐다.
이 인연에 더해 서울에 있는 동안 송경운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이기발은, 전주로 낙향한 후 송경운을 다시 만나 이 악사의 마지막 10년을 같은 공간에서 가깝게 지켜봤다.
'송경운전'은 이처럼 입전 인물과 작가가 시공(時空)을 함께 한 경험의 결과로, 작가가 입전 대상을 만나 대화를 나눈기억을 장면 재현의 방식으로 생생하게 제시한 예가 많다.
전주에서 보낸 송경운의 여생이 담고 있는 다채로운 내러티브를 다가산과 용머리고개, 서천(西川) 등의 현전하는 장소에 고스란히 결부시킬 수 있다.
그는 당시 전주의 어디쯤에서 살았을까? 이기발이 전주의 서쪽에 있던 빙치, 우리말로 하면 얼음언덕에서 전주성 내에 복사꽃과 오얏꽃이 가득 핀 풍경을 감상하다 송경운을 만난 장면을 묘사한다.
'조선시대 전주에도 다가산 아래 얼음을 보관하던 빙고장이 있었다.그래서 빙치는 다가산 부근으로 추측이 된다'
송경운은 전주성의 서쪽에 살았다. 지금의 서문 부근 인긍에 살았던 것 같다.
'송경운은 전주 완산성 서쪽에 살았는데, 그의 집은 언제나 북적였다. 손님이 오면 송경운은 성심성의껏 연주하여 만족할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신분이 높은 사람뿐 아니라 하인들에게도 똑같이 성심껏 연주했다. 20년동안 한결같았으니 전주사람들은 감복하여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서울에서의 명성이 그대로 전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송경운전’이 돋보이는 것은 드물게 주인공의 음악관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비파는 옛가락과 요즘 가락이 다른데, 지금은 대개 요즘 가락을 숭상한다. 하지만 나는 홀로 옛가락에 뜻을 두어 왔다. 무릇 소리를 낼 때 옛가락에 의거하면 요즘 가락이 끼어들지 못하고, 내 마음도 흡족하여 가히 음악답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나의 연주를 듣는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인지라 이런 음악에 즐거워하지 않더라. 음악을 듣고도 즐거워하지 않는다면…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싶다. 이 때문에 특별히 곡조를 변화시켜 요즘 가락을 간간이 섞어서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송경운의 음악적 이상은 옛가락에 바탕한 느리고 고상한 음악이었지만, 별다른 음악적 교양이 없는 전주의 보통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송경운은 자신의 음악관만 고집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즐거워하는, 아마도 당대 유행하던 빠른 템포의 새로운 음악도 레퍼토리에 포함시켰음을 짐작게 한다.
자칫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한 비파 명인의 존재를 후세에 알려준 것만으로도 ‘송경운전’의 가치는 작지 않다. 나아가 조선시대 음악가들도 오늘날의 음악가들 만큼이나 순수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고심했음을 알게 한다.
‘송경운전’은 음악가의 전기이지만, 동시에 한 시대의 음악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송경운도 송경운이지만 서귀가 일구어낸 예술적 성과 역시 높이 평가하고 싶다.
‘송경운전’은 음악가의 전기이지만, 동시에 한 시대의 음악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일흔셋에 숨을 거두었다. 제자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 새벽에 서천(西川)을 건넜으며, 상여는 남쪽을 향했다.
제자들이 연주하는 비파 소리가 상엿 소리와 어울렸다. 구경나온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찌 저와 같은 사람을 볼 수 있을까” 하며 눈물을 흘렀다.전주 한옥마을을 찾는 사람들이여! 그를 생각하며 서천(西川)에 한 번만이라도 눈길주기를 부탁한다./이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