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서양화가 이순재
최초 서양화가 이순재
구술 : 이정열(李廷烈) 1927년생(80세) 전 전북일보 서울분실장
채록 : 김명신ㅣ자료제공 : 전주문화재단ㅣ정리 : 박창우 기자
이순재의 서양화.<경지전> (1940년대 전후 작품, 작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일제의 전주침탈과 식민시대 구술실록 p.294)
◇ 아틀리에
아버님은 신흥학교 다닐 때에도 그림만 그리고 수학시간에도 그림을 그려. 그러다가 선생님한테 혼나고 그러니까 신흥학교 교장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라고 자꾸 권해가지고 신흥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미술학교로 갔거든. 그 전해에 유명한 오지호 선생이 일년 먼저 유학을 가셨어. 그 양반이 광주제일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전주북중으로 전학을 왔어. 그때는 전주고등보통학교지.
아버님이 신흥학교 학생이니까 18살이나 되셨겠지. 그 양반이 일년 먼저 유학을 가고. 오지호하면 서양화가로 우리나라에서는 알아주는 화가거든. 그 다음으로 우리 아버지가 일본으로 유학을 가셨거든. 그래가지고 다니시다가 그때는 대학이 아니라 미술학교라고 했지. 전문학교도 아니고 그냥 학교라고 했어. 그 당시에는 일본에 전문학교라는 게 없었어. 대학은 제1고, 제2고, 제3고 이런 식으로 고등학교가 지금으로 말하면 예비대학이여.
2학년을 졸업해야 대학입학을 하거든. 중학교 4학년, 고등학교 2학년 그리고 대학 4학년 그렇게 다니시는데 조선에 나와서 학교 전시회에 가보기도 하고 그러는데 거기서 김영창이라고 수채화를 하는 학생인데 말하자면 그 양반을 발굴을 했지. “너 서양화하면 성공하게 생겼으니까 서양화를 해라. 수채화를 하지 말고.” 그래가지고 우체국 앞에 4층 건물 3층에다가 화실을 만들었어. 아틀리에를.
아틀리에 이름은 몰라. 어릴 때라. 그래가지고 거기에 김영창씨, 돌아가신 작촌 조병희, 하반영, 이복수, 천칠봉 이런 사람들이 와서 우리 아버지한테 서양화 데생에서부터 소묘교육을 받았지. 그러다 집안에서 돈을 안대주니까 졸업을 못하고 나와 가지고 전북일보에 기자로 입사하셨어. 기자하면서 삽화를 그리고 만화 그려주고 여러 가지 했어.
그러다가 해방 절에 ‘동강신물’이라고 한글로 나온 신문이 전북일보에 있었는데, 그것을 일본 놈들이 폐간을 시켜 버렸어. 일본 놈들이. 그래서 신문사 직원들하고 도청으로 들어가셨다가 해방을 맞이했는데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는 서양화 물감도 없어. 일본 가야 있어. 그런데 우리 아버지 그림도구를 어떤 놈들이 싹 훔쳐가 버렸어. 그러니까 그림도구를 살 수도 없지. 더구나 물감도 전혀 없지.
◇ 고아원 원장으로
해방되어가지고. 해방되기 전 같으면 사지. 일본 놈들이 갖다 파니까. 해방되고 아직 일본하고 무역도 안 되고 그러니까 그림을 못 그리고 중단해 버렸지. 조선미술전람회를 선전이라고 하지. 지금은 국전이지 말하자면. 일제 때 거기서 7회에서부터 13회까진가 입선을 하셔가지고 무감사위원이라고, 지금 같으면 추대작가지. 그러다 해방되어가지고 우전면 고아원 원장을 하셨어. 우전면 고아원이 일본 관영이었거든. 경부가 원장을 했었어. 경부하면서. 지금 선덕보육원. 그때는 전주보육원이라고 그랬지.
해방되고 정부가 없으니까 군정청에서 우리 아버지를 원장으로 임명을 했어. 왜냐면 거지나 이런 사람들을 보면 돈이고 옷이고 다 벗어주고 오고하니까. 신문사 기자하면서도. 그러니까 “이순재, 이 양반이 원장을 해야 한다.” 고 각계에서 말하니까 원장이 되었어. 미 군정청이 아니라 건국준비위원회지. 정부가 생기기 전이니까. 고아원 원장을 하시다가 54살에 돌아가셨어. 그때 나는 서울에서 기자할 때인데 그 전날 편지를 받았었는데, 그 다음날 돌아가셨다고 삼라일보사에서 전화가 왔어. 너희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그래서 전주로 확인해 보니까 돌아가셨다고 그러더라고.
그때가 자유당 말기여. 그래가지고 내려와 보니까 그림이고 사진이고 다 태워버렸더라고. 어머니가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래서 그림 한점도 없고 다 태워버렸어. 남은 것이 없어. 아버지 사진만 내가 한 장 가지고 있고. 그길로 서울에서 내려와 전북일보에 다시 들어갔지. 서울신문사 그만 두고. 25살에 나를 낳았다 했으니까 내가 87이고 살아계시면 112살 되겠구먼. 15대째 전주에서 살고 있어. 내가 15대 손이여. 완산동에서 태어났어. 아버지도 완산동에서 태어나셨지. 우리 집안이 유명한 집안이여. 15대나 살았으니까. 할아버지가 초대 전주면장하시고 화단에서 서양화가로는 우리 아버지가 시조지 말하자면.
◇ 이응로와 김영창
우전면 농민들 행사(기세배 축제)가 있으면 옛날에는 용그림 깃발을 들고 가고 그러지. 그걸 아버지가 항상 그려줬어. 우전면 일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
고아원 원장에다가 그림을 그리셨으니까. 아버님 활동하실 때 교제하셨던 친구 분들은 앞에서 이야기했던 김영창씨, 작촌도 서양화 하다가 작촌아버지가 그림쟁이 하려면 너 공부 안 시킨다. 그때는 그림 그리는 사람들을 환쟁이라고 했거든. 그래서 작촌도 그림을 못 그리고 말아버렸지. 아버님께서는 누가 보아도 그림에 원체 소질이 있으니까 초대면장하신 할아버지로 모다 집안에서는 장려를 했지. 개명된 사람들이라.
이응로라고 알지? 그 양반도 내가 3~4살 때 우리 집에 와가지고 나를 업어주고 우리 집에 와서 “형수님 밥 한 그릇 주시고 막걸리도 한잔 사다주시오.” 그래서 얻어먹고 그랬대. 나중에 김영창씨가 나보고 쭉 이야기를 하더구먼. 김영창씨가 불란서에 가자고, “자네 업어주고 했던 이응로 화백이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자네 아버지하고 호형호제하고 지냈는데…….” 그러면서 가자고 했는데 결국 암으로 돌아가셨어.
김영창 화백님에 대해서는 잘 알지. 서울에서 같이 지내면서 내가 그림 배우고 했으니까. 그 양반이 사범학교 다닐 적에 그때 고등과라는 것은 초등학교 나온 사람들이 2년 동안 강습 받고 선생으로 나가는 강습과가 있었고 선생이 모자라니까 일제 때 사범학교 심상과 3학년인데 우리 아버지가 동경미술학교 다닐 적에 나와 가지고 사범학교 전시회에 가보니까 수채화를 아주 잘 그렸거든. 그러니까 일부러 찾았어. 나이가 너댓 살 어리지. 우리 아버지는 대학교 다니고 거기는 이제 중학교 3학년이고 그러니까. 찾아가지고 너 수채화 해봐야 소용없다. 서양화를 해라. 유화를 그려라 그래가지고 유화계로 끌어들였어. 그래가지고 부잣집 딸을 중신했어, 김영창씨를.
정씨라고 아주 유명한 전주 정씨. 전주에서는 말마디나 하는 부잣집이여. 그래가지고 부인이 500석을 지참금으로 가지고 왔어. 그러니까 이 양반이 선생도 그만두고 그림만 열심히 그리기 시작했지. 500석을 가지고 들어오니까 걱정이 없어졌지. 선생도 할 필요가 없고 그래가지고 그림을 그리신다고 그 양반은 누구같이 돈 주고 입선하려고도 않고 누구라고 말은 못하지만 돈 주고 입선한 사람도 있거든.
내가 아는 사람도 그림을 팔려고도 안 해. 내가 그림도 배워야겠는데 딱하니까 그림을 한꺼번에 몽땅 팔아주고 그랬어. 변호사네 판사네 이런 사람들한테 이 양반 그림이 우리나라에서는 알아주는 그림이니까 사두면 돈이 된다고. 그래가지고 한꺼번에 그때 돈으로 삼천만 원어치 그림을 팔았어. 호당 30만 원 이하는 절대 팔지를 않았어. 일전 한 푼 깎아주지도 않고 팔아주어도 그림 한점 주지도 안 해.
그때가 공화당 지낸 뒤에. 내가 공화당 말기에 전북일보를 그만두었거든. 김영창 선생님은 일본으로 유학은 안 갔어, 거기는. 여기서 순전히 우리 아버지한테 서양화 배우고 했지. 그런데 나중에는 우리 아버지보다 그림이 좋아졌어. 그래가지고 잘못 알려진 일을 이복수라고 전매청 다니던 분이 화간데, 지금 아들도 화가고, 그 양반도 와서 배웠지. 그 양반이 전라북도 서양화의 역사를 바로 잡았어. 우리 아버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빼먹고 김영창씨를 시조처럼 이야기 하니까 전북일보에다 투고를 해가지고 그걸 바로 잡아주었지. 그러니까 나는 ‘금릉’한테 그림 배웠다고 나보고 직접 하는 이야기라. 아버지가 스승이라는 거 알았지. 금릉선생이라는 것을.
◇ 진짜배기
아버님 호는 청람. 청람 이순재하면 화단에서는 알아줬지. 선전 7회부터 입선을 했으니까. 이중섭이도 선전 7회부터 입선을 하고. 전주에서는 7회 입선한 분이 조화석씨라고 우리 미술선생 있어. 나 미술 가르친 양반. 그 양반이 제2보통학교 선생 하다가 일제 때 평양 사범학교 선생으로 일약 승진해가지고 가버렸지. 그 양반도 7회부터 입선했거든.
그 사람도 부인이 미술선생이고 아들이 나하고 동기동창인데 아들은 그때 그림을 안 그렸어. 김영창씨는 10회에 입선을 했어. 계속해서 입선을 했지. 그래가지고 김영창씨는 국전 추대작가가 되었지. 그 양반 제자가 이거(돈) 써가지고 미리 입선한 놈이 하나 있어. 누구라고 말은 못하지만.
스승보다 먼저. 이걸(돈) 잘 써 그때는. 국전이 돈으로 사고팔고 할 때거든. 해방 후지. 일제 때는 선전이고 해방 후에는 국전이 되었거든. 그랬다가 이것 먹고 형무소 가고. 그러니까 국전을 없애버렸거든. 그런데 김영창씨는 없어. 그림을 팔아줘도 10원 한 장 소용없다니까. 나는 그림 배우려고 팔아주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30% 딱 내놓거든. 자기가 부른 값에서. 이 양반은 국물도 없어. 진짜배기 예술가지.
나도 금릉선생에게 그림을 늘 배웠지. 이론은 내가 더 잘 알고. 왜 일본에서 서양의 유명한 사람들이 쓴 미술관계 서적을 몽땅 사왔었거든. 그러니까 세관에서 나보고 책장사 하시냐고. 그래서 내가 지금 신문사 부국장인데 책장사 하겠냐고, 내가 필요해서 사가지고 오는 것이라고 말했지.
◇ 세계적 화가의 산실은 전주
조병희, 2001, 완산고을의 맥박, 신아출판사, 291~294쪽
◇ 간판집 개척사(開拓社)
세계적 화가 고암 이응로(李應魯)는 1904년 예산에서 출생하여 1989년 1월 10일, 86세로 프랑스 파리에서 서거했다. 1922년 22세 때 19세인 朴貴姬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고암이 전주에 정착한 때는 1924년이었으니 24세의 새파란 청년이었다. 그는 19세 때인 1923년 해강 김규진(海崗 金圭鎭)에 사사하여 같은 해 제2회 鮮展(조선미술전람회) 사군자(四君子)부에서 청죽(晴竹)으로 입선하고, 이듬해 전주시 중앙동 4가 25번지(현 88식당 자리)에서 개척사(開拓社)라는 점방을 열고 간판을 그리는 한편 건물을 도장(塗裝)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때에 신사구락부라는 모임도 조직했었다. 보통정도의 체구를 벗어나지 못한 그는 늘 헌팅캡을 쓰고 무릎까지 닿는 스타킹을 신는 경쾌한 차림새로 작업을 하다가도 밖에 드나들었다.
조선미술전람회를 감상하는 여학생 (1922년). (일제의 전주침탈과 식민시대 구술실록 p.287)
◇ 죽사(竹史)
당시 그는 틈만 생기면 효산 이광렬(曉山 李光烈 ; 1885~1966) 댁에 드나들었다. 효산은 고암보다 19세 연상으로 서예와 사군자로 조선 예단(藝壇)의 중견작가였으며 전주에서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으니 고암으로서는 존장으로 모실 수 있는 노선생이었다. 고암은 효산으로부터 예술에 대한 조예를 쌓는 한편 사사로운 일에 있어서도 친숙한 사이로 지내왔다.
때에 고암은 사군자 가운데 대나무 그림이 뛰어나 이상에서 밝힌 바 제2회 선전 사군자부 입선에 이어 전주에서 출품한 작품으로는 1930년 제9회 선전 사군자부에서 풍죽(風竹)과 청죽(晴竹)이 입선됐다. 1931년 제10회 선전 사군자부에서 대죽(大竹)과 풍죽(風竹), 청죽(晴竹), 분죽(盆竹), 매(梅) 등 네 폭의 출품이 한꺼번에 입선되고, 특선으로 이왕직(李王職)의 상을 받는 동시에 이왕직에서 사들이는 운도 따랐으니 선전사상 유례가 없었던 일로서 그의 실력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고암은 죽사(竹史)라는 호를 가지고 출품했는데 죽사란 효산이 지어준 호이다.
◇ 전주를 훌쩍 떠나다
고암은 이렇듯 화려한 화력(畵歷)을 장식하고, 세계를 향하여 용솟음치려는 꿈을 꾸고 있었으나 전주에서 그의 화려한 앞날을 예측할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예술의 고장 전주에서 묘목으로 자라나서 줄기가 뻗어나고 잎이 벌어 꽃이 필 무렵 전주에서 훌쩍 떠났다.
전주에서 아홉 해를 보낸 고암은 1935년 일본에 건너가 동경본향회 연구소 서양화과에 들어갔다. 1936년에는 가와바다(川端), 화학교(畵學校)에 진학하여 남화의 대가 마쓰바야시 게안게쓰(宋林桂月)에 사사하고, 1938년 제17회 선전 동양화 부에서 “동도하안(東都河岸)과 동원춘사(東園春事)"로 입선. 1939년 제 18회 선전 동양화부에서 ‘여름날’과 ‘쓸쓸한 가을’로 입선, 1940년 제 19회 선전 동양화부에서 ‘가을’로 입선, 1941년 제 20회 선전 동양부에서 ‘봉춘흥아(逢春興亞)의 집’으로 입선, 1942년 제 21회 선전 동양화부에서 ‘동도교외(東都郊外)’로 입선, 1943년 제 22회 선전 동양화부에서 ‘장날’로 입선. 1944년 제 23회 선전 동양화부에서 ‘춘추이제(春秋二題)’로 입선하였다.
특히 1939년 선전 제 18회 동양화부에서 특선하고 화신백화점에서 첫 개인전. 1940년 선전동양화부에서 무감사로 출품하고 화신백화점에서 제2회 개인전, 1945년 조국해방 직후 귀국하여 위 그림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한편 단구미술학원(壇丘美術學院)을 창립하는데 가담, 1947년 조선미술협회(朝鮮美術協會) 상임위원으로 출품하고 전주에서 개인전, 1948년 홍익대학 동양학과 주임교수로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 1950년 전남 광주에서 개인전, 1955년 ‘동양화 감상과 기법’을 저술하고 대한미협에 출품, 1958년 서독에서의 초대전을 계기로 서독에 간후 파리로 자리를 옮겨갔다. 대어(大魚)는 바다를 만나야 활개를 치듯 고암의 도약은 국제적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박귀희씨와 합의 이혼하고 박인경(朴仁景)씨와 재혼했다. 한국이 낳은 천재적 화가 고암은 세계를 무대로 국제적 화랑에서 수십 차례의 개인전과 초대전과 발표전을 가졌으며 영예로운 상을 받았으나 본고에서는 이를 생략하고, 재불중(在佛中) 국내에서 벌어진 일들을 추려본다.
1975년 서울 현대화랑 초대전, 1977년 서울 문화화랑에서 무화(無畵) 발표전, 1989년 호암 갤러리의 발표전을 손꼽을 수 있다. 6·25사변 때 행방불명된 아들이 동베를린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고암은 혈육의 정을 참지 못하여 동베를린으로 달려갔으나 아들은 만나지도 못하고 고역을 치렀던 1967년 이른바 동베를린 사건과 1977년 백건우(白建宇), 윤정희(尹靜姬) 부부 납치 사건 등으로 국내 화단과는 단절된 상황에서 13년 만에 조국에서 다시 열리는 호암 갤러리 발표전에 초청되어 귀국을 며칠 앞두고 서거했다.
정상적인 학업과정을 밟지 아니한 고암이 오늘날 세계적 화가로 자리를 굳히게 된 배경에는 천재적 예능과 더불어 강철 같은 의지와, 고난의 극복에 있을 것이다. 대쪽같은 장인정신으로 동양의 서예(사군자 포함)적 추상에 바탕을 두고 우리민족의 예술적 표현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고암은 반평생을 프랑스에서 보냈는데 프랑스어는 한마디도 쓰지 아니했을 뿐만 아니라 배우려고 생각조차 안했다.
이응로 작. Dance(1988년). (일제의 전주침탈과 식민시대 구술실록 p.289)
◇ 삼천여 명의 외국인 지도
삼천여 명의 외국인을 지도했는데도 부인 박인경씨의 통역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의 작품생활에 있어 한지(韓紙)를 즐겨 쓴 것만 봐도 이를 짐작하게 될 것이다. 고암은 학생들이 자신의 그림을 흉내 내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언제나 독자적인 그림을 그리도록 지도했다는 것이다.
고암은 만년에 “내가 그림을 시작한 것이 벌써 50년이 되었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소년 시절의 자유롭던 환경을 제외하고는, 약 10년을 주기로 여섯 번의 변천을 가져왔다. 20대는 우리나라 전통인 동양화의 서예적 기법을 기초로 한 모방시기라면, 30대는 반추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자연사실에 대한 사의적(寫意的) 표현이었다. 50대는 구라파에서 추상화가 시작된다. 후기 10년은 서예적 추상이다.” 고 회고담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고암의 작품에서는 시대적 특징과 민족적 의식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 선샤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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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전주침탈과 식민시대 구술실록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