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고장

전주의 영화 초창기 간판장이 이야기(하반영의 제국관)

이종근의 행복산책 2023. 11. 20. 15:30

전주의 영화 초창기 간판장이 이야기

전주는 전주국제영화제가 개최되는 영화의 도시이다. 잘 알다시피 전주에서는 해방 직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아리랑’(1954)이 제작됐고, 전주 극장가는 2000년 지금과 같은 대기업 멀티 플렉스 영화관이 개관하기 전까지 서울과 비견할 만한 대형 스크린과 최신영사기를 갖춘 곳으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영화극장 골목이었다.

그러나 초창기 전주는 극장이 활발하게 운영되거나 주목할 만한 영화의 도시는 아니었다. 전주 최초의 극장은 지난 1925년 일제강점기에 개관한 ‘제국관(帝國館, 해방 이후 전라북도도립극장으로, 1957년부터는 ‘전주극장’으로 변경)’이었고, 당시 이웃 군산에서 ‘군산극장’과 ‘희소관’이라는 2개의 극장이 운영된 것에 비해 전주는 극장 개관이 뒤늦었다. 여기에 제국관은 해방 직후까지 전주의 유일한 극장으로 운영됐을 정도였다. 다음으로 지난 1950년경 전동성당 근처 공터에 전주경찰서 후생사업체의 가설극장으로 후생극장이 출현했고, ‘백도극장(百都극장, 1980년대에는 아카데미 극장으로 운영)’으로 명칭을 바꿨다. 이후 전주에서 몇몇 후속극장들이 개관했고 본격적인 전주 극장가의 경쟁에 돌입했다.

한편 초창기 영화계와 극장가에서의 미술인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파 작가들은 귀국 이후 생계를 위해 영화 간판을 그려야 했다고 그들의 후손과 주변인들은 증언했다. 일본 유학파로서 최초의 전북 서양화가로 활약했던 이순재는 동광신문의 기자 생활을 하다가 일제에 의해 신문사가 폐간되자 잠시 영화의 간판을 그렸다고 전해지며, 같은 일본 유학파로서 이순재와 관계를 맺었던 인물들도 간혹 이순재를 만나러 전주에 왔다가 그를 도와 간판을 그렸다는 구술기록이 있다. 또 이순재는 초창기 영화인들과도 친분이 두터워 나운규, 윤봉춘 등과 같은 영화인들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고, 이외에도 유명한 영화인들이 전주로 내려와서 이순재를 의지하며 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그 무렵 백도극장의 일원들은 서울에서 영화를 배급받아 극장상영에만 만족하지 않고 ‘전주를 한국의 할리우드’로 꿈꾸며 직접 영화제작에 뛰어들었다. 이중 이순재의 매제 김영창은 백도극장을 운영하다 영화제작사 ‘청룡프로덕션’을 설립한 인물로서, 지난 1939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백도극장에서 선전책임을 맡아 간판을 그리던 이강천을 영화감독으로서 발탁한다. 이후 이강천은 지난 1954년, 1955년, 1956년 등 30여 편의 영화감독으로 활동했다. 또 우리에게 납북된 영화감독으로 잘 알려진 신상옥 감독 또한 동경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한 미술학도였다.

영화제작자로서 김영창은 지난 1963년 한국최초의 총천연색 극영화를 제작하며, 특히 미술 부문 스텝으로 간판을 그리던 하반영을 채용했다. 1950년대 흑백영화 시기에는 미술 분야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미술은 단지 영화의 소도구를 챙기거나 상황에 따른 공간연출과 가구 배치 등이 전부였다. 그러나 1960년대 칼라영화를 통한 영화의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전문적이고 강렬한 색채 조명을 통한 입체적인 영화가 제작됐고 영상 수준에 따라 영화가 평가돼 영화에서 미술

 분야의 중요 성을 인식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허드렛일로 취급되던 미술 분야에서 전문미술 교육을 받은 담당자들이 새롭게 등장했고 하반영은 이들 중 선두에 선 인물이었다. 이후 영화미술에서 떠나 서양화가로 활약한 하반영은 폐쇄적인 순수미술 학계에서 간판장이로 불리며 서양화가서 저평가됐지만, 탁광은 “누가 뭐라 해도 영화미술로는 일인자였다”고 『전북 영화이면사』(1995)에서 회고했다.

하반영, 1920년대 제국관



김미선 | 예대 강의전담교수·서양미술사

 © 전북대학교 신문방송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