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28> 팥빙수와 남원 요천 빙고(氷庫)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28> 팥빙수와 남원 요천 빙고(氷庫)
전주 안행지구에 있는 '안행' 카페 유기그릇에 개인 접시에 팥빙수가 나온다.맛도 좋고 대접받는 기분이며, 분위도 짱이다.
조선시대의 문신 장유(1587~1638)가 ‘여름에 제조되면 요술’이라고 읊은 게 이 얼음이다. 그런데 400년이 지나 정수기로도 뚝딱 만든다. 장유는 ‘빙부(氷賦)’라는 이 시 바로 다음 구절에 이렇게 읊었다. ‘겨울에 없는 것은 재앙’이라고. 400년 동안 대체 뭔 일이 있었을까.
‘얼음이 없었다.’
태조 6년 12월 29일의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간략하게 적지만 간단하게 볼일이 아니었다. 음력 11월과 12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는 걸 당시 재이(災異·재앙이 되는 괴이한 일)로 여겼다, 군주를 향한 하늘의 꾸짖음이 바로 재이라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에 기반해, 유교를 표방한 조선에서는 바짝 긴장했던 것 같다.
얼음이 얼지 않으면 왕은 신하의 상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죄수를 풀어주기도 했다. 이 태조 6년을 포함해 조선은 450년간(태조~철종) 총 26회의 무빙(無氷) 기록을 남겼다. 태종·세종·중종 때 각각 4회, 성종 때 3회다. 그런데 조선 후대로 갈수록 무빙 기록은 상대적으로 뜸해진다.
얼음은 권력이었다.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 좌찬성을 지낸 강희맹은 개인 얼음 창고(사빙고·私氷庫)를 한강 변에 마련했다.
얼음은 하사품이었다. 임금이 왕족, 신하들에게 나눠준 얼음을 반빙(頒氷)이라고 했다. 여름에 더위를 식혀줄 얼음을 하인이 줄을 서 받아갔다. 종이 없는 신하들은 받을 수 없었다. 그러자 ‘업자’들이 나섰다. 남아도는 ‘얼음 분양권’인 빙표(氷票)를 모아 거래했다. 일종의 ‘딱지’인 셈이었다.
얼음은 장례용품이었다. 상(喪)치레가 긴 왕족·사대부가 죽으면 시신 부패를 늦추기 위해 사용했다. 이를 빙반(氷盤)이라 불렀는데, 시신 밑에 얼음판을 댔다.
얼음은 언제나 상품이 됐다. 18세기 후반 이후 한강의 얼음업자들은 겨울에 얼음을 쟁였다. 3분의 2가 녹아서 사라지고, 나머지 3분의 1을 돌아오는 여름에 팔았다. 그래도 남는 장사였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빙고는 석빙고만 6곳이다. 목조 빙고였던 동빙고와 서빙고 등은 남아있지 않다.
전주 완산동 시외버스정류소 옆에 세워져 있는 ‘우리 마을 빙고리 이야기’를 알고 있는가. 현 완산동은 조선시대 부남면(府南面)의 은송리(隱松里)ㆍ곤지리(坤止里)와 부서면(府西面)의 빙고리(氷庫里)이다. 빙고리는 조선시대 전주천의 얼음을 보관해 놓은 굴이 있던 곳으로, 이 동네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임실 얼음창고는 현재 2곳이 남아있다. 관촌역 앞 1곳, 바로 인근 시기마을에 2개 동이 바로 그것이다. 인근 공덕마을에도 1개 동이 있었지만 도로공사로 인해 자취를 감췄다는 최성미 임실문화원장의 설명이다.
요천변 남원 빙고에는 특별한 사연이 전해온다. 임진왜란 이후 왜적들의 악랄한 만행에 관해 요천 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노스님이 혼잣말하며 사람들 곁을 지나고 있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한 사람이 노스님에게 달려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묻자, 스님은 “요천변 바위에 굴을 파고 겨울철 꽁꽁 언 요천의 얼음과 남쪽 지방에서 나는 백급이라는 약초를 구해다 가루를 내어 굴속에 넣어두면, 내년 여름에 요긴하게 쓰일 데가 있을 것”이다고 일러 주었다. 스님의 말에 따라 요천 변 산기슭에 동굴을 파서 겨울철 요천에서 채취한 얼음을 가져다 동굴에 채우고 백급가루를 함께 넣어 두었다.
1597년 8월, 왜적들이 쳐들어와 남원성이 함락되며 많은 이들이 죽고 부상자도 속출했다. 부상자들을 치료할 약이 없어 애가 타던 때에 동굴에 넣어둔 얼음과 백급가루로 피 흘리는 부상자들을 치료했다는 이야기이다. 동굴에 얼음을 보관하였던 일대를 빙고치라 불렀으며 지금도 요천 인근 산책로에는 빙고로 쓰였던 동굴 입구를 살펴볼 수 있다.
1500년대 말에 제작된 남원 고지도에는 광한루 맞은편에 있는 요천변 승월대 옆에 얼음 창고인 빙고가 표기되어 있다.
노상준 전 남원문화원장은 승월대 아래 빙고치에는 지금도 큰 침니가 있어 빙고를 만들어 재현한다면 요천과 어울리는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고 했다. 남원 백성들은 그 이후로 은어의 진상품 품격과 고급화를 위해 요천변에 얼음 창고 빙고를 만들어 임금에게 올리는 은어 진상품에 사용했다 구전에 의하면 남원출신 황희정승은 새벽에 일어나 섬진강에서 올라온 요천 은어를 잡아 축지법으로 순식간에 임금님 아침 밥상에 올렸다는 김용근선생의 연구 결과도 보인다.
1984년 남원문화원이 빙고유적의 지표조사를 실시한바 늦은 봄까지 얼음발(0°c)이 있는 빙고 터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 해인가부터 요천 변 빙고는 관리되지 못하고 폐허가 되어 고지도 속에서 기록으로만 남게 됐다. 요즘처럼 무더운 날이면 남원 요천의 빙고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