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스토리

정읍 입암에서는 빨치산이 자주 내려와 마루 밑에 구덩이 파고 벼 저장

이종근의 행복산책 2023. 8. 8. 14:55




벼 저장고의 유형은 크게 짚두지형(통가리), 흙두지형(사방을 흙벽으로 하고 나무 문짝을 문틀에 끼우는 방식), 목조형, 자루형, 통나무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중 보편적인 것이 짚두지형과 흙두지형이며 목조형(나무로 짠 것), 자루형(재활용이 가능한 대형 자루처럼 만들어서 실내에 보관), 통나무형(나무의 속을 파냄)은 희소성이 있다. 짚두지형이 경기도, 충남, 전라도, 경남지역에서 우세하며 경북과 충북지역에서는 흙두지형이 일반적이며 목조형, 자루형은 각지에서 드물게 보인다. 한때 강원도 홍천지역에서는 목조형이 성행하였으며 강원도 평창지역에서는 통나무형도 성행했다. 이밖에 진주지역에서는 대나무로 벼 저장고를 만드는 경우도 많았으며 가정이나 일부 지역에서 본 조사에서 포착하지 못한 다양한 벼 저장고의 유형이 있었다.
‘한국 농가의 벼 저장고(글쓴이 김덕묵 한국외국어대학교 초빙교수, 펴낸 곳 국립민속박물관)’는 전라도에서도 벼 저장고를 지칭하는 말로 ‘두지’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된다고 했다. 경상도에서 두지라고 하면 곳간 형태나 나무로 짠 것을 말하는 데 비해 전라도에서는 벼를 저장하는 저장고 자체를 전부 두지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인 형태는 짚으로 만든 벼 저장고인데 이것을 ‘두지’라고 한다. 짚으로 만들거나 옆을 가마니 후에는 함석으로 만들기도 했으나 이 지역의 벼 저장고 형태는 짚으로 만든 것이다. 함석 두지는 1960년대 후반부터 성행한 것이다. 이 지역에서도 곳간 형태나 나무로 짠 궤짝 형태도 나타나지만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전북 북부인 익산지역에서는 짚으로 만든 벼 저장고를 ‘통가리’라고 부르는데 이 지역은 방언도 충남지역과 동일하며 벼 저장고도 충남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읍시 입암면 연월리

정읍시 입암면 연월리는 마을의 개천을 경계로 신월마을과 반월마을로 나뉘며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마을은 산비탈에 위치하며 앞으로는 농토가 있다. 제보자(1952년생, 여)는 22살에 이 마을 장흥 고씨 집으로 시집을 왔다. 과거에는 홀태로 벼를 훌터서 탈곡을 하여 바람개비로 바람을 일으켜서 알곡과 쭉쟁이를 골라내었다. 이렇게 하여 알곡을 벼 저장고에 저장하여 봄까지 양식을 했다. 부자들은 봄철이 되면 곡물 가격이 상승하니 이때 판매하였다. 날씨가 가물어서 흉년이 들면 벼에 열매가 제대로 익지 못해 고개를 숙이지 못하고 서 있다. 그래도 열매가 제대로 익지 않은 것을 베어서 쪄서 먹었다. 지금을 현미라고 하지만 약간 알맹이가 붙어있는 것을 먹었다. 요즘 같으면 가축 사료로 사용할 것인데 그것도 당시에는 귀해서 제대로 못 먹었다고 제보자는 기억한다. 이렇게 되면 보릿고개까지 기다렸다가 보리밥을 먹는데 보리밥도 실컷 먹어보지는 못했다. 이 마을에서는 짚으로 만든 두지를 주로 사용하였으며 나중에는 함석으로 만든 것이 나왔다. 일부 집에서는 나무로 짠 두지도 있었다. 한국전쟁 때는 빨치산이 자주 왔기 때문에 양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마루 밑에 구덩이를 파고 넣어두었다. 과거 제보자의 집에는 마당가에 ‘유지저리’를 하는 곳에는 시멘트로 바닥을 10cm 정도 발라놓았다. 그 위에 짚단을 깔고 가마니를 깐 다음, 함석을 둘러서 볼트로 조여서 벼를 저장했다. 지붕은 마름(이엉)으로 인다. 벼의 굵은 부분이 위로 가게 하여 삿갓 모양을 만들어서 꼭대기 부분을 씌운다. 제보자의 집에서는 높이 160cm 정도로 하였으며 넓이는 세 발 정도가 됐다. 제보자는 보지 못했으나 함석 앞에는 짚을 엮어서 돌려 놓았다고 집안 어른들에게 들었다고 한다. 여기에도 쥐가 많이 들어온다. 과거 할머니가 계실 때는 “유지저리 가서 방아 찧어 와라.” 하면 벼를 가지고 방앗간으로 가서 몇 가마니씩 찧었다고 한다.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고 나면 쌀로 시공을 주었다. 유지저리는 이 지역의 일반적 용어는 아니고 이 집 사람들이 사용하던 용어이다.
필자가 강경에서 만난 정읍 산내면 능교리가 친정인 아주머니에 의하면 능교리에서도 과거 마을에서 몇 집정도 즉, 부자들은 짚으로 만든 두지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곳의 형태도 밑에는 짚단을 놓고 이엉을 엮어서 옆으로 두른 다음 이엉으로 지붕을 이는 일반적인 것이다. 능교리에서는 이것을 ‘나락 두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벼가 얼마 되지 않는 가난한 집에서는 두지가 필요 없었다. “없는 집은 방에 두었다가 찧어먹지”라고 아주머니는 말한다.
제보자의 집에는 과거 소나무로 짠 큰 두지도 있었다. 나무 두지는 지붕이 있는 처마 아래에 두었다. 높이는 사람 키 정도 되었으며 가로 한 발, 세로 150cm 정도 되었다. 두지는 6년 전 집을 신축하면서 없앴다. 주민들은 대부분 유지저리를 많이 하였으며 나무 두지는 소수에 불과했다.
정읍시 입암면 연월리에서는 한국전쟁 때 빨치산이 자주 내려와 양식을 요구하여 마루 밑에 구덩이를 파고 벼를 저장한 가정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공출이 심하고 한국전쟁 때는 피난을 가기 위해 양식을 땅에 묻어놓는 사례가 많은데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시대상에서 파생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고창군 고창읍 성두리

성두리는 고창읍 가까이에 있어 빈집만 나면 바로 외지인들이 사서 들어오기 때문에 마을의 가구수는 유지되고 있다. 과거에는 쌀, 보리, 고구마, 과일, 원예작물 등을 많이 했으며 명주와 모시도 하였으나 명주와 모시는 더 이상 전승되지 않고 있다. 제보자(1937년생, 여)는 함평 이씨로 정읍에서 20살에 이곳 광산 이씨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 과거에는 논에서 벼를 베어 말린 후 집으로 가져와서 타작을 하여 벼를 두지에 넣어 보관하였으나 추곡수매를 하면서부터 두지는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됐다. 지금은 먹을 것은 40kg짜리 마대에 넣어 창고에 저장하고 나머지는 논에서 베어 바로 방앗간으로 가져가서 판매한다
이 마을에서는 과거 짚으로 만든 두지를 마당가에 놓고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벼가 적은 집에서는 가마니에 넣어 보관했다. 마당가에 짚단의 굵은 부분이 밖으로 가게 하여 둥글게 깔고 옆에는 가마니를 원통 모양으로 두른다. 지붕은 마름(이엉)을 엮어서 덮은 후 가장 위에는 짚을 삿갓모양으로 만들어 씌운다. 가난한 집에는 두지가 없고 부잣집에만 있었다. 부자들은 가을에 벼를 두지에 보관하여 봄에 방아를 찧어서 팔았다. 제보자는 이 마을에서 나무 두지는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두지’라고 하면 짚으로 만든 것을 지칭했다고 한다. 벼가 조금밖에 없는 집에서는 가마니에 넣어서 보관하였다

△익산시 금마면 신룡리 구룡마을

구룡마을은 익산 미륵사지 뒷산인 미륵산 기슭에 있는 마을이며 남양 홍씨가 많이 살았다. 과거 60가구 정도가 되는 마을이었으나 현재 토박이 주민은 50여 가구되며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도 많다. 제보자(1944년생, 남)는 밀양 박씨로 구룡마을에서 태어나서 현재까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은 10여 마지 짓는다. 제보자는 과거 5칸 한옥에 거주하였으나 지금은 주택을 신축하여 살고 있다. 그는 지금의 집에 그전만 못하다고 말한다. 과거의 한옥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했다고 한다. 그는 전통적인 것을 좋아하며 집에서는 주로 검정고무신을 신는다. 검정고무신은 편하며 흰고무신에 비해 때가 묻지 않아서 좋다고 한다.
(과거에는 벼를 베어서 말린 다음 집으로 옮겨서 짚가리를 만들어 놓고 홀태로 훌터서 벼가 많은 집에서는 통가리에 벼를 보관하였다. 추곡수매제도가 실시되면서 더 이상 통가리를 필요없게 되어 마을에서 사라졌다. 근래에는 논에서 벼를 베면 바로 탈곡을 하여 건조장으로 실고 가서 말린 다음 정미를 하여 판매한다.
익산은 전북에 속하나 충청도와 말씨가 같으며 문화 역시 충청도에 가깝다. 그래서 그런지 충청남도 지역에서 많이 보이는 통가리가 이 지역에서 대세였다.
벼를 집으로 가지고 와서 홀태로 훑어서 마당 한 구석에 만들어 놓은 통가리에 넣는다. 통가리를 만들 때는 작은 묶음 모양으로 짚단을 만들어서 굵은 부분이 밖으로 향하게 하여 둥글게 쌓는다. 이렇게 50cm 정도 쌓은 다음(이렇게 짚단을 올려놓으면 바닥의 흙을 돋아놓을 필요가 없음) 짚단을 평평하게 만들어 위에 나락을 늘어놓는 멍석을 깐다. 옆으로는 짚으로 나래(이엉)를 엮어서 돌린다. 그 속에 나락을 넣고 새끼줄을 돌린다. 새끼줄은 2cm 간격으로 칭칭 감아놓는다. 이렇게 하면 나락을 집어넣어도 터지지 않고 옆으로는 쥐가 들어가지 못한다. 위에는 이엉을 덮고 꼭대기에는 짚을 삿갓 모양으로 엮어서 굵은 부분이 위로 가게 하여 씌운다. 농사를 많이 짓는 사람은 통가리가 높고 적게 짓는 사람은 통가리가 낮다. 나락이 많은 사람들은 통가리 높이가 사람 키보다 높다. 제보자의 앞집은 과거 부농이었는데 통가리를 몇 개씩 세웠다. 부잣집은 통가리가 100섬도 들어가고 50섬도 들어가는 등 크기는 다양하였으며 통가리가 큰 것은 높이 2.5m, 둘레의 직경이 5~6m가 됐다. 농사를 많이 짓는 집은 대개 통가리가 두 개씩은 됏다. 나락 통가리가 있는 집은 부잣집이기 때문에 이 마을에서도 과거 3집만 했다. 제보자의 앞집에는 과거 나무 두지도 있었다. 두지 위에는 지붕을 이었다. 지붕은
대나무를 엮어서 위에 황토를 발라서 초가지붕을 이었다. 이 마을에서 나무 두지가 있는 집은 앞집이 유일하였는데 40년 전에 없앴다. 소농가는 보관할 벼가 적어 통가리가 필요 없었다. 제보자의 집에서는 과거 농사가 적어 가마니에 벼를 넣어서 광에 두었다. 벼를 가마니에 두면 습기가 차지 않아서 보관상태는 좋은데 쥐가 많이 먹었다.

△익산시 웅포면 맹산리

맹산리는 웅포대교를 사이에 두고 부여군 양화면 내성리와 마주하고 있다. 금강이 옆에 있어서 수자원이 풍부하고 예로부터 벼농사가 많이 행해졌다. 제보자(1942년생, 남)는 파평 윤씨로 이곳에서 벼농사를 지어온 토박이 주민이다. 이 마을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은 통가리가 없었으며 농사를 제법 짓는 사람들은 벼장고로 짚으로 만든 통가리를 사용했다. 과거 마당가에 통가리를 했다. 짚을 작은 크기로 묶어서 둥글게 깔아 50cm 정도 놓고 그 위에 가마니를 펼쳐놓는다. 그리고 옆으로는 짚으로 이엉을 엮어서 두른다. 웅포대교를 건너면 있는 이곳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부여군의 마을에서는 옆으로 가마니를 두른 후 짚을 둘렀다고 하나 이 마을에서는 짚만 둘렀다고 한다. 통가리의 높이는 남자들의 키높이 정도 되었다. 이 마을에서 나무 두지는 보지 못했다. 고구마 통가리는 수숫대로 만들어 방 윗목에 두었다. 가난한 사람은 추수 후 남는 것이 별로 없어서 가마니에 넣어서 방에 두고 먹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통가리가 없었기 때문에 통가리의 유무를 통해서 그 집의 경제력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가난하여 장가를 못간 사람들은 짚으로 가짜 통가리를 세워두고 사람들을 속이기도 했다
한편 임실군 덕치면 두지리 신기마을 짚으로 만든 ‘뒤지'는 오늘날 현지에서 볼 수 없다./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