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역사 문화 이야기 19> 유학자 성당 박인규와 구강재
<전주 역사 문화 이야기 19> 유학자 성당 박인규와 구강재
전주향교 윗편 옥류동(교동) ‘구강재(龜岡齋)’가 게스트 하우스로 거듭났다. 이는 ‘거북언덕집’으로, 거북이 편안하게 알을 낳는 공간이라는 의미한다.
전주 교동에서 태어난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 1889~1957)은 600년 된 그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월당공 최담의 후예다.
스승인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는 "금재는 나에 못지않은 학자이며, 그의 학문을 조선에서도 따를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나라가 어지러울수록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당시 옥류동(교동)에 '염수당(念修堂)'이라는 서당을 열고 후학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옥류정사(玉流精舍)'를 지어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선비들을 모았다. 이때부터 한옥마을에 전주 인근에 살던 학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 중 한 사람이 성당(誠堂) 박인규(朴仁圭, 1909~1976)다.
'거북이가 알을 낳을 수 있는 공간(언덕)'이라는 구강재의 의미가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바로 이곳은 필자의 친구 2명이 대학 시절에 자취를 했던 곳이며, 1990년에 수십 차례에 걸쳐 소줏잔을 기울이면서 잠을 잤던 곳이다.
당시, 한 친구에게 경서를 가르치던 경와(敬窩) 엄명섭(嚴命涉) 선생의 아들 양암(陽菴) 엄해주선생이 이곳에서 살라고 했던 것. 그러나 당시 필자는 이곳에서 화장실을 갈 때면 반드시 어떤 영정 사진 앞을 지나가야 해 무서웠었다.
바로 이곳이 게스트하우스로 바뀌었다는 말을 듣고 발품을 팔았다. 전주 덕진구청에서 공무원을 하고 있는 한 친구가 필자의 이야기를 듣고 이곳을 방문한 사실에 놀랐다. 그는 1991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 주인장이 낯익은 얼굴이어서 반가웠다. 유영래 관리자는 편액과 주련, 영정, 책자 등을 촬영하는데 100% 협조해줬다.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필자는 전주향교 동재에서 기숙하면서 한문을 공부한 마지막 세대로, 금재 최병심의 제자 엄명섭선생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명륜당에서 다람쥐와 발을 맞추면서 한문공부를 하며 끓여 먹은 라면 맛이 생각났다.
당초의 정읍시 소성면 구강정사(龜岡精舍)는 박인규(朴仁圭, 1909-1976)선생의 서실 겸 유유자적처터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고 영주지(瀛州誌)에 전하고 있다. 여기서 영주(瀛州)는 고부군(古阜郡)의 고읍(古邑)를 말하며 지금의 고부면으로 그 지역에 있었다.
성당 박인규는 금재선생의 가르침을 생각하면서 정읍 '구강정사를'를 통째로 전주에 이축, 정착했다. 그는 우당(尤堂) 김용승(金容承)의 문하에서 학문을 하다가 스승의 별세 후 유언에 따라 금재의 문하에 들어갔다.
면와(俛窩) 이도형(李道衡, 1909~1975)이 ‘구강정사 상량문(龜岡精舍 上梁文)’을 남긴 바, 무신(戊申)으로 기록됐으니 1908년이다. 아버지 時煥(시환)때부터 있었던 것 같다. 박인규선생은 그 다음해에 태어났다.
‘건축의연 방명록’ 편액은 인근 고재 이병은의 아들 면와 이도형이 1천원을 냈다(1905년 4월)는 기록 등이 드러난다. ‘의연방명록’(1908년 4월 남양 홍경한 서) 편액, 존양실(存養室) 편액(만취헌주인), 광제당(光霽堂, 광풍제월(光風霽月,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갠 날의 달로, 훌륭한 인품을 비유의 줄임말) 편액(강암 송성용), 구강재 편액(술암 송재성) 등은 물론 주련(柱聯)도 모습을 드러냈다.
6개의 주련을 한글로 옮기면, ‘발산 아래 계곡 사이에 광무(고종)의 해와 달, 대한제국의 갈 길이구나. 도가 높여지고 물이 흐르니 학문의 도로 연못마다 빛난다.(鉢山峯下 漢溪洞中 光武日月 大韓別區 道尊洙민(門자 안에 䖝(벌레 충), 학준담화(學遵潭華)는 해석이 가능하다.
금재가 작고한 후에도 성당은 최규만 등과 함께 서당을 운영했다. 그러나 염수당은 1966년에 폐교했다고 한다.
선생의 ‘성당사고(誠堂私稿)’가 전하고 있다. ‘신묘중하목록(辛卯仲夏目錄)’은 옥류동으로 스승인 금재선생을 찾아가 문답한 한문문장의 작문법에 대해 적고 있으며, ‘옥산집촉록(玉山執燭錄)’은 금재의 서거 나흘 전에 금재의 문집에 대한 유언을 적고 있다.
‘남양사봉안일록(南陽祠奉安日錄)’은 1963년 4월 13일, 남양사에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을 봉안한 기록이다. ‘유도유흥사실록(儒道維興事實錄)’은 자신이 노구를 이끌고 유학을 부흥시키고자 전주향교에서 강학회를 주도한 사실을 적고 있다.
‘당시 전라감사 이도재, 조한국, 이성열이 항상 공무를 마치면 그곳으로 나와 시를 읊고 담담한 즐거움을 함께 했다. 이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어느 날 전북지사 이진호(李軫鎬)가 잠업소를 시설한다는 명목으로 면장 등을 시켜 한벽당 주변의 토지 2,000평을 팔도록 종용해 끝없이 설득했다. 병심이 말했다. “저들은 속임수로써 우리의 정부를 빼앗았고 또 금전으로 나의 집터를 도모하려들고 있다. 그러나 차라리 빼앗길지언정 팔 수 없다” 그들이 데리고 와서 “토지수용령을 집행한다” 하고서 가족과 살림살이를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놓고서 집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병심이 말했다. “나는 이 땅에서 죽을지언정 한 걸음도 옮길 수 없다” 7일 동안 밥 한 톨을 먹지 않았다. 그들은 겁을 내어 집을 지어주고 대지를 되돌려주겠다고 맹세를 했다. 이렇게 해서 빼앗긴지 24년 후에 전북지사 이원보(李源輔)가 조선총독 남차랑(南次郞)에게 말해 이로 인해 되돌려줬다’
‘선계 김형배에게 올림(與仙溪金丈馨培)’으로 일체 치하에 있어 겪은 한벽당의 역사 한토막이다. 집터를 강탈해 집터를 설치했던 곳은 지금의 전주한벽문화관 주변이라고 한다.
‘현암촌약(玄岩村約)’은 자신의 고향 동민들에게 낭독해 효우의 실천을 주도하고자 지은 동약(洞約)이다.
그는 1939년 가을 고부향교에서 열린 문묘대제 때 봉독관으로 초청을 받았다. 만세삼창과 황국신민서사를 읽어야 했지만 기어이 거부했고, 이로 인해 일경에게 수 차례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임종을 앞둔 병상에서도 온갖 고통을 견디며 금재의 항일운동 즉 일제의 토지수용령에 결사 투쟁한 금재의 일화를 다룬 ‘한전사실추록(韓田事實追錄)’을 발표했다. 이는 일본이 금재의 한벽루 주변 토지를 강탈하고자 잠업소 설치를 명분으로 토지수용령을 내렸는데 이 과정에서 겪었던 금재의 고초와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적고 있다.
‘발산 산 아래 몇 채의 초록색 지붕, 담장 밖에는 남천이 밤낮없이 흐르네. 이런저런 인간사 모두 버리고, 다만 성리를 스스로 찾아 좇으려네(구강재에서) ’
그는 금재 사후에 정읍 고부의 구강정사를 뜯어와 선생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옮겨짓고 ‘구강재(龜岡齋)’라 이름을 붙였다. 그는 구강재를 지은 목적을 분명히 했으니 이곳은 집안의 재산이 아닌, 학문에 뜻이 있는 자들을 위해 강의하는 곳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는 시에 다름 아니다. 옥류동 ‘구강재(龜岡齋)’가 게스트 하우스로 새로 태어나 그대로 남아있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