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8> 전북 완주 갈동유적에서 2,200년전의 하이테크 산업의 제작틀 나오다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8> 전북 완주 갈동유적에서 2,200년전의 하이테크 산업의 제작틀 나오다
2002년 5월 어느 날, 호남문화재연구원이 전북 완주 이서면 반교리 갈동마을을 지표조사 하고 있었다.전주시 관내 국도의 우회도로 건설을 위한 사전조사였다. 그러나 아무런 고고학적인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2003년 8월1일이었다. 1호 움무덤(구덩이 파고 시신을 묻은 묘)에서 상상도 못할 유물이 출토됐다. 세형동검 거푸집 1쌍이었다. 거푸집 중 한 점은 벽에 붙어서, 다른 1점은 옆으로 기울어진채 확인됐다.출토지점이 바로 이곳(완주 갈동)인 거푸집이, 그것도 세형동검의 거푸집이라니. 무엇보다도 2,200년 전 최첨단 청동기를 찍어내던 하이테크 산업의 제작틀이 나온 것이다.
‘세형동검(細形銅劍)’은 검의 몸체가 좁고 가늘다고 해서 이름붙은 청동칼이다.기원전 4세기~기원전후 주로 한반도에서 확인되기 때문에 ‘한국식 동검’이라 일컬어진다. 갈동 출토 세형동검은 기원전 2세기 유물로 판단됐다. ‘세형동검 및 꺾창 거푸집’은 청동기시대의 존재는 물론이고, 한국 고유의 청동검까지 대량 생산했음을 보여주는 ‘100% 확실한 물증’이었다.그제서야 일제강점기 무렵 이후 100년 이상 계속된 한국고고학계의 오랜 갈증이 해소된 것이다.
2003년 도로건설예정지로 낙점된 완주 갈동에서 거푸집이 출토되자 노선이 변경됐다. 그 변경 지점에서도 고운무늬 거울과 세형동검 등 기원전 2세기 초기철기시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갈동 출토 거푸집 세트는 세형동검(한국식 동검)을 만드는 ‘한 쌍’(합범·合范)이었다.
세형동검 거푸집은 안쪽 부분이 검게 그을린 상태로 확인됐다.무덤에 넣기 전에 여러번 사용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한쪽의 뒷면에 청동꺾창(ㄱ자 형태로 나무에 끼워 말에 탄 적병을 낚아 베는 무기)의 한쪽 틀이 새겨져 있었다.이게 무슨 뜻일까. 원래는 ‘청동꺾창’의 합범(2개의 틀을 맞춘 거푸집)으로 제작·사용되다가 한쪽이 파손되자, 나머지 완전한 한쪽을 ‘세형동검 거푸집’으로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갈동 출토 거푸집은 엄밀히 말해 ‘세형동검(1쌍)’과 ‘청동꺾창(0.5쌍)’ 등 두 종이었던 것이다. 청동꺾창 거푸집 반쪽도 갈동 유적 어디엔가 묻혀있지 않을까.
갈동 발굴에서 출토된 ‘거푸집 세트’(2003)와 ‘고운무늬 거울 2점’(2007)은 모두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되었다. 그만큼 완주 갈동 유적의 위상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완주 갈동에서 불과 600m 떨어진 전주 원장동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류. 세형검 5점과 칼자루끝장식(검파두식) 3점, 고운무늬 거울 2점 등 각종 청동제품이 출토됐다.
2000년대초 갈동 인근 지역이 전주 혁신도시 예정부지로 선정됐다.대상 부지에 대한 발굴 결과 갈동 유적과 비슷한 초기철기시대(기원전 2~1세기)의 유구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갈동에서 불과 600m 떨어진 전주 원장동에서는 세형검 5점과 칼자루끝장식(검파두식) 3점, 고운무늬 거울 2점 등 각종 청동제품이 출토됐다.
또 완주 신풍에서는 무려 81기의 초기철기시대 무덤군이 노출됐다. 특히 고운무늬 거울이 10점이나 출토됐고, 청동투겁방울(간두령·장대의 머리에 끼운 방울 모양의 청동기)이 한 쌍 확인됐다. 이 지역 수장급 지도자가 옥수수 모양 청동방울을 흔들며 하늘신·조상신과의 접신을 시도했을 것이다. 또 신풍유적에서는 청동기 보다는 철기가 유독 많이 보인다. 이 역시 청동기-철기의 과도기를 드라마틱하게 증거해주는 무덤 양상이다.
이와같은 초기철기시대 발굴성과가 쏟아지자 새삼 각광을 받게 된 유적·유물이 있었다.
앞선 1975년 학계에 보고된 완주 상림리 유적이다. 즉 그해 11월30일 전북 완주 이서면 상림리 주민이 묘목을 옮겨심다가 수상한 유물 더미를 발견한다.이는 26점이 묶인 채 발견된 청동검 더미였다. 이상했다. 무덤도, 주거지도 아닌 곳에 덜렁 이 동검 더미만 묻혀있을까. 더욱이 형태나 기법상으로 보아 중국 산둥(山東) 지역에서 세력을 떨쳤던 제나라 동검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 파악됐다.
상림리 동검의 본향이라 할 수 있는 산둥 반도에 웅거했던 제나라의 전횡(기원전 250~202) 관련 설화가 눈길을 끈다. 전횡은 진시황에 의해 멸망한 제나라의 왕족 출신이었던 인물이었다.
전횡은 제나라를 재건하려다가 실패한 뒤 한나라 건국 후 산둥성 칭다오(靑島) 전횡도에 숨어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횡 문하의 빈객 500명도 따라 죽었다. 이들을 ‘절개를 떨친 전횡오백사(田橫五百士)’라고 한다.
그런데 전북 군산에서 가장 서쪽 섬인 어청도에서 바로 전횡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전횡과 500의사가 죽지 않고 망명길에 올라 3개월만에 어청도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어청도 마을의 한가운데는 전횡을 모시는 치동묘(淄東廟)가 자리잡고 있다.
‘치’는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를 가리킨다. 치동묘는 임치의 동쪽에 있는 사당이라는 의미이다. 어청도는 산둥반도와 약 300km가량 떨어져 있다.
그렇다면 갈동 등에서 쏟아진 기원전 2세기 유적·유물은 어떻게 설명할까.
고조선은 천하의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그 시점에도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 있었다.그러나 진나라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 조선에 망명의사를 타진한 연나라인 위만을 받아준 것이 화근이 됐다.
고조선의 준왕은 “제가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겠다”는 위만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중책을 맡겼다.
그러나 위만은 반란을 일으켰고, 준왕은 결국 망명길에 오른다.
아닌게 아니라 전북 지역에는 준왕의 망명과 관련된 설화가 여러편 전해진다. 군산의 북동쪽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원나포(나리포 혹은 나시포)는 준왕의 첫 상륙지로 알려져 있다.
그곳의 공주산(公主山)은 망명한 준왕의 공주가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 공주산의 건넛마을에는 임금(준왕)이 온 곳이라 해서 어래산(御來山)이라 한다.
그런데 갈동을 중심으로 한 전북 지역에서는 기원후 1세기 이후의 문화층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준왕의 후손이 끊어졌다’는 '삼국지'와 '후한서'의 기록을 뒷받침해주는 대목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