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스토리

영조 어필로 정읍출신 숙빈최씨(영조 어머니)를 만나다

이종근의 행복산책 2023. 7. 9. 16:01

 

정읍 태인에서 고아로 지내던 숙빈최씨는 관직을 맡아 부임하는 민씨 부부의 눈에 띄어 훗날 궁궐에 들어가 무수리로 지내다가,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이 되고, 21대 영조대왕의 어머니가 된 인물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7일부터 갖고 있는 소장 유물 가운데 국가도 문화재로 지정된 자료를 총 망라한 온라인 특별전 장서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에서 정읍출신 숙빈최씨를 만날 수 있다. 이 전시는 2년 전 장서각 전시실에서 개최한 특별전-장서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의 확장판으로 볼 수 있다. 보물 영조어필-숙빈최씨사우제문원고(英祖御筆-淑嬪崔氏祠宇祭文原稿)와 보물 영조어필-숙빈최씨소령묘갈문원고(英祖御筆-淑嬪崔氏昭寧墓碣文原稿)가 전시된다. 숙빈최씨와 관련한 보물 3점을 소개한다. 편집자

 

보물 영조어필 -숙빈최씨사우제문원고(英祖御筆 - 淑嬪崔氏祠宇祭文原稿)

 

영조어필-숙빈최씨사우제문원고(英祖御筆-淑嬪崔氏祠宇祭文原稿)’는 영조(1694~1776)1726116일에 친어머니 숙빈최씨(淑嬪崔氏, 1670~1718)의 생신을 맞아 숙빈묘(淑嬪廟)에 올렸던 제문의 원고이다. 주홍색 화문 비단에 싼 표지에는 어제친제제문초(御筆親祭祭文草)’영조어제어필, 숙빈최씨궤연 및 정빈이씨사우치제문 발본(英祖御製御筆, 淑嬪崔氏几筵 及 靖嬪李氏祠宇致祭文 抄本)’이라 쓰여 있다. 또 제문 뒤에는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진종(眞宗孝章世子, 1719~1728)의 생모인 정빈이씨(靖嬪李氏, 1694~1721)에게 올리는 짧은 축사(祝詞)도 함께 쓰여 있다. 숙빈최씨는 최효원(崔孝元)의 딸로 7세에 입궁해 숙종의 후궁이 되었고, 1694913일 창덕궁에서 영조를 낳았으며, 1718(숙종 44) 31949세로 사망하자 그해 512일 양주 땅(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장사지냈다. 영조는 1725(영조 1)에 사친(私親친어머니)을 위해 육상묘(毓祥廟)를 건립(현 서울 종로구 궁정동 1-1 七宮) 어머니의 신위를 봉안했다. 처음에는 소령묘(昭寧墓), 육상묘(毓祥廟)이던 것을 1753년에 소령원(昭寧園),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시켰다.

조선의 어필은 전반적으로 희귀한 편이다. 하지만 영조는 역대 국왕 중 어필을 가장 많이 남긴 인물에 속한다. 시문, 판각으로 전하는 현판, 글씨 등 내용과 크기에서 다양하다. 그 가운데 이 원고는 여러 영조어제어필 시문원고 가운데 낱장이 아닌 왕실의례용 공첩(空帖)에 직접쓴 희귀한 예이다. 안진경체를 토대로 하고 영조의 성정기질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영조 특유의 서풍이 나타나기 시작한 33세의 필적이다. 내용 또한 사친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나타나 있다.

 

보물 영조어필-숙빈최씨소령묘갈문원고(英祖御筆-淑嬪崔氏昭寧墓碣文原稿)

 

영조어필-숙빈최씨소령묘갈문원고(英祖御筆-淑嬪崔氏昭寧墓碣文原稿)’는 영조가 51살 때인 1744(영조 20) 7월에 사친 숙빈최씨의 소령묘의 묘갈문을 짓기 위해 쓴 초안 원고이다. 이 원고에는 어머니 조상의 이름과 추증 연월, 어머니가 궁에 들어간 나이 등이 비어 있는데, 현재 숙빈최씨의 무덤 소령원(昭寧園)에 세워진 묘갈문에는 모두 채워져 있으며 내용도 일부 추가됐다. 또 원고에서는 영조가 전면대자(前面大字)를 쓰고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가 비음(碑陰)을 쓴다고 했다. 현재 묘갈문에는 전면대자와 음기 및 위쪽 전자(篆字)를 영조가 쓰고, 묘표(1718묘비(1725년 신도비묘갈을 세운 곳과 묘갈을 세운 월일을 서평군 이요에게 쓰게 하여 묘갈 받침대인 농대석(籠臺石)에 새긴다고 되어 있다. 이 원고는 영조가 즉위한 뒤 사친에 대한 추숭사업의 과정에서 남긴 필적의 하나로서 영조의 까다로운 성격이 그대로 연상되는 영조 노년의 독특한 어필서풍을 보여준다.

‘(중략) ! 이제 비석을 세우는 것은 정해진 묘호(墓號)를 드러내어 후세에 전하기 위함이다. 만약 터럭만큼이라도 과장된 뜻이 있다면 어찌 평소의 도리를 따르는 것이겠는가! 전면의 대자(大字)는 직접 쓴 것이다. 내가 지은 음기(陰記)는 서평군(西平君) ()에게 명하여 깨끗하게 쓰게 했다. ! 25년 동안 낳아주고 길러주신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 듯하다. 이제 이 비문을 지음에 문임(文任)의 신하를 버려두고 소략하게나마 내가 기술한 것은 또한 자식으로서 사친의 조심하는 마음을 체득함이라. 붓을 잡고 글을 쓰니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뒤덮는다. 지난날을 추억하노니 느꺼운 마음이 곱절이구나

이 원고는 장서각에 소장된 여러 영조어제어필 시문원고 가운데 숙빈최씨사우제문원고와 더불어 의미 깊은 필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보물 숙빈최씨 소령원도(淑嬪崔氏 昭寧園圖)

 

보물 숙빈최씨 소령원도(淑嬪崔氏 昭寧園圖)는 숙빈 최씨(1670~1718)의 무덤인 양주(楊洲)의 소령원(昭寧園)을 그린 묘산도이다. 숙빈 최씨는 영조의 생모로 1718(숙종 44)에 사망하여 양주 고령동 옹장리(현 경기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묻혔다. 이때는 영조가 즉위하기 전이라 묘()라 하였다가 1753(영조 29) 소령원(昭寧園)으로 봉해졌다. ‘묘소도형여산론(墓所圖形與山論)’은 두꺼운 종이에 먹으로 상단에 제목을 쓰고, 가운데 산도(山圖)를 그리고, 하단에는 산론(山論)을 적었다. 이 그림은 길지를 택하는 과정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718년에 제작된 원본일 가능성이 있다.

소령원도(昭寧園圖)’는 산도의 형식을 취했으며 가운데 묘소와 좌측의 제청(祭廳), 우측의 비각(碑閣)을 배열하고 아래쪽에는 전답이 그려져 있다. 산수 표현에서 가늘고 기다란 피마준(披麻皴)이 미점(米點)과 더불어 사용됐으며, 화면 곳곳에 밝은 담채를 가했다. ‘소령원화소정계도(昭寧園火巢定界圖)’는 능원에 산불이 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일정한 거리까지 초목을 불살라 제거하는 화소(火巢)를 표시한 것이다. 붉은 주선으로 화소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전체적으로 산도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거칠고 빠른 필치의 피마준으로 산수 표현을 하였다. ‘소령원배치도(昭寧園配置圖)’는 백묘로 소령원의 석물 배열을 나타낸 그림이다. 봉분 주변의 담장과 비석, 혼유석, 상석, 장명등, 망주석, 문인석 등을 실재 위치에 맞추어 그렸다. 아래 세 점의 그림은 소령원 승격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18세기 후반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네 종의 그림은 잘 도침된 닥종이에 그려진 회화식 지도로써 의궤와 더불어 왕실 원묘와 관련된 중요한 시각자료로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