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매곡교와 석전(石戰, 돌싸움)
전주 매곡교와 석전(石戰)
전주시민들이여! 사는 게 고달프거든 매곡교에 반드시 한번 가보시라!
단돈 몇 천원을 벌기 위해 밤잠을 설치고 나와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삶이 무엇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5욕7정의 세상사를 알 수 없을 터이다. 조상 대대로 이어온 매곡교의 새벽시장, 남부여대, 곡식을 이고지고 나와 팔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시간들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질곡 많은 게 우리네 삶인가! 나는 가끔 매곡교 새벽시장으로 발길을 옮겨 사람 냄새 풀풀풍기는 상인들을 통해 생기를 느끼곤 한다.
‘1931년 9월 전주부호 박기순의 기부금으로 개축한 나무다리가 바로 전동의 ‘매곡교(梅谷橋)’다. 장다리, 연죽교, 쇠전다리로 부르는 등 명칭이 다양하며, 서천교가 1936년 8월 대홍수로 유실되면서 1938년 3월 매곡교를 서천교 동쪽 상류의 현 지점에 세웠다’
고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발간)고 나온다.
여기의 ‘매곡(梅谷)’은 맷골(매골, 매꼴)을 의미, 투구봉과 검두봉 사이에 있는 다리라고 나오며, 동완산동에 자리한 것으로 기록됐다.
초록바위의 애환을 뒤로 하면 물길은 이내 매곡교에 이른다.
예전엔 완산칠봉 골짜기 산기슭엔 봄이면 매화나무 꽃이 만발해 사람들은 이곳을 매곡이라 불리웠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얼어붙은 냇물과 자갈밭에서는 사내 아이들과 남자 어른들이 어울리어 연날리기가 한창이었다. 연 날리는 패들은 쇠전 강변 언저리로부터, 매곡교를 지나 전주교가 가로 걸린 초록바우 동천(洞天)에 이르기까지 가득하였다”(최명희의 ‘제망매가’ ‘전통문화’ 1983년 2월호 162쪽)
전주천은 ‘남문시장이 냇물을 끼고 있어 그날 벌어 그날 먹어야 하는 하루벌이 장사꾼들의 차지였다’는 매곡교와 ‘약(藥) 장수 창극으로 언제나 흥성거렸다’는 다리 아래 ‘쇠전강변’ 넓은 자갈밭에 이르러 놋쇠소리를 내기도 한다.
“매곡교는 가장 빈번하게 사람들이 왕래하는 다리였는데, 다른 곳과는 달리, 다리 위에서 온갖 광주리를 펼쳐놓고 장사를 하는 통에, 사람과 광주리에 채여 그 틈새를 꿰고 지나갈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중략…) 숲말댁은 눈짓으로 매곡교 다리 아래 조금 비킨 자갈밭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삿갓 같은 무명 차일이 드리워져 있었다.”(최명희의 ‘제망매가’‘전통문화’ 1985년 11월호 163-4쪽)
이 다리는 남부시장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 사시장철 이른 새벽부터 지금도 사람들이 붐빈다고 해서 ‘시장 다리’로 부르기도 하며, 다리 아래에 넓은 백사장에 우(牛)시장이 열려 쇠전(廛)다리, 담배장수와 담뱃대 장수들이 좌판을 벌이고 앉았다고 해서 연죽교(烟竹橋), 혹은 설대전(廛)다리로 불리우기도 했다. 여기의 ‘설대’란 이대라고도 하며, 대나무의 일종으로 바구니, 담뱃대, 화살대, 조리 등을 만들 때 쓰인 물건을 이름한다.
‘남문밖 장날’과 같이 2, 7일장으로 쇠장이 섰다. 쇠장이 서는 날이면 간이식당처럼 차린 술판에서는 주모들의 간드러진 목소리에 소값을 털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으며, 다른 한켠에서는 투전판이 벌어지는 등 쇠장터의 애환을 고스란히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쇠장터는 일본인들의 전주천 정화라는 미명하에 전주교대부속초등학교 남쪽 자리로 쇠장을 옮겨진 뒤, 매곡교 다리 밑의 (쇠장터)가 사라졌다.
특히 매곡교 부근의 연날리기는 전주만의 풍경으로 한때 유명했으며, 완산동패와 부중(府中)의 20대 안팎 청년들이 자웅을 겨룬 돌싸움(石戰)도 있었다.
팔매질을 하는 사이, 부중패가 몰릴 때는 지금의 팔달로와 관통로가 연결된 전주객사까지, 완산패가 몰릴 때는 완산칠봉을 타고 넘거나 용머리고개까지 진격했다.
남천과 서천으로 갈라 강변을 끼고 싸전다리를 경계로 동남진이 학봉리패, 사정멀패, 남문거리패, 반석리패, 향교골패, 공수내패이고, 서북진이 서문거리패, 곤지리패, 은송리패, 빙고등패, 군자정패, 용머리골패였다. 쌍방 패거리들은 각기 1백명씩 10대-20대-30대 순으로 승부를 겨루며 행동권은 동남진이 남천교에서 싸전다리까지의 선이고, 서북진이 서천교에서 싸전다리까지의 선이다. 고함소리와 비명소리, 남천과 서천에서는 온통 소름 끼치는 처절한 싸움이 계속되다 달이 중천에 오르면 그친다.
전주 부중에서 연례적으로 벌어졌던 석전의 유래를 밝혀 낼 수 있는 문헌은 찾을 길이 없으나 고노(古老)들의 말에 의하면 오랜 세월에 걸쳐 전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석전은 두 패로 나뉘어져 돌팔매질을 하여 승부를 겨루던 놀이로서 음력 정월이나 5월에 벌어진 편싸움으로서 척전(擲戰)이라고도 불리었다.
이 풍속의 기원은 고구려 때로서 국가적 연중행사로 왕이 환전(歡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신라, 고려 때에도 이와 비슷한 행사가 있었으며 조선 중종 때에는 삼포(三浦)왜란을 석전으로 수습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튼 전주부의 석전은 근세에 이르기까지 존속됐다.
전라도는 임진왜란을 이겨낸 의병의 고장인 까닭에 당국에서는 암암리에 묵인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임진왜란의 여러 육전에서 자주 비치는 석전은 당시에 우리가 조총을 갖지 못했고, 무기가 빈약한 환경에 있어 석전은 당당한 무기의 구실을 했다.
명량해전에서도 고단한 우리 전함을 에워싸고 대드는 왜적을 수마석(水磨石) 으로 적의 머리통을 부셨던 안위(安衛)장군의 용맹을 회고하게 된다. 필자도 전주부중의 석전에는 참가한 일이 있으므로 역력한 그 시설을 더듬어 내게 된다.
전주 부중의 석전은 일명 팽매 쌈이라 하는데 대개는 정월 대보름날 망월과 때를 같이하여 터진다. 작촌 조병희선생이 살아생전 필자에게 해준 석전을 고스란히 소개한다.
포진선은 싸전다리(현 전주교 부근)를 중심으로 하여 동남진인 학봉리패, 사정밀패, 남문거리패, 반석리패, 향교골패, 공수내패 등이고, 서북진인 서문거리패, 곤지리패, 은송리패, 방고등패, 군자정패, 용미리골패 등이다.
그리고 행동권으로는 동남진이 남천교에서 마전다리까지 선이고, 남북진은 서천교에서 마전다리까지 선이었다. 동원되는 연인원은 쌍방이 거의 비슷하며, 연령은 10, 20, 30대였다.
대개 서전(序戰)에서 회전(會戰)까지 터를 잡는 장소로는 쇠전 강변(중부 완산동[完山洞]에 붙은 천변으로 우[牛]시장이 있었다)과 초록바위(곤지산[坤止山]의 낭떠러지)로서 이 지대는 자갈이 많고 인가가 드문 곳이기 때문이었다.
출전하는 장비로는 얼굴을 보호하기 위하여 밥 덮개(밥그릇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솜을 두툼히 두어 만든 것으로 오늘날 방한모 비슷한 물건)를 머리에 쓰고, 옷도 비교적 두툼한 것을 입는다.
팔매질 도구로서는 칡 줄, 질갱이 줄, 삼 줄, 새끼 같은 섬유질의 줄과 투척도구로는 왕대 버팅 개 등을 사용하게 되는데 팔 힘이 센 사람은 손 팡매질을 한다. 튼튼한 전대나 기타 용기에 쓸만한 자갈은 대낮에 미리 준비해 둔다.
이렇듯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린봉에서 대보름달이 떠오르는 시각을 군호로 끼리끼리 패가 되어 진터에 포진하게 되는데 때에 탐색꾼들은 연신 상대편의 정보를 살피곤 했다.
이윽고 양쪽 진에서 팔매질한 돌이 날아 서전이 터지게 되면 남천과 서천 일대는 썰렁해지고 만다.
서전은 여남은 살 정도인 아이들로부터 시작되어 힘깨나 있어 보이는 20대로 대치되어 소나기처럼 날아드는 자갈로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다가 30대도 참가하여 그야말로 고동판이 벌어지는데 어느 편이고 한쪽이 무너지면 기세에 따라 끄뭇 해진다.
다시 시작되는 몇 고비의 접전 끝에 호기찬 함성으로 끝난다.
이토록 석전 놀이는 완산 부성 젊은이들의 기개를 높히던 놀이로 알려졌으나 일제 때인 1920년경에 금지됐다.
'정월 대보름 달맞이 밤은 / 웃녁 아랫녁 다리마다 동이나네 부령, 청진정어리 파실런가 / 칠산, 연평조기 파실런가
구슬뀌듯 물고 밀리어 길목마다 묻히네 .....'
정월대보름 기린봉 봉우리에 보름달이 떠오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남천교와 서천교로 몰려들어 다리밟기를 했다. 자기 나이만큼 밟으면 한평생 병없이 오래 살 수 있다는 옛 풍속 때문이다. 기린봉에 보름달이 솟아오르고, 곤지봉.투구봉에선 ‘만월이야’를 외치는 소리, 남천 서천교에선 횃불의 행렬, 사람들은 일제히 둥근달을 바라보며 다리밟기를 시작한다. 물론 자기의 나이만큼 밟는다. 또 자기의 가족이나 친구의 1년간의 평안함도 함께 빌어주기도 한다. 처녀 총각들은 각기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몫까지도 밟아준다. 이는 전주의 다리밟기(踏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