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감영 기녀와 권번, 유곽
전라감영 기녀와 권번, 유곽
1884년 11월 10일 전라감영을 방문한 주한미국공사관 대리공사 조지 클레이턴 포크(1856~1893)는 김성근 전라감사로부터 2박 3일간 융숭한 접대를 받았습니다. 당시 국가로부터 조선에 관한 정보 수집을 했지요. 그는 8번의 식사 대접이 이어졌습니다.
포크를 위한 연회 장소는 전라감영의 선화당으로 이곳에서는 1피트(약 30cm)가 넘는 고임 음식이 차려지고 기생들은 승전무를 추었습니다.
그는 승전무에 대해 ‘무용수들이 때때로 줄을 서서, 다시 짝을 지어, 등을 맞대고, 사각형으로 움직였습니다. 붉은 술이 달린 네 쌍의 북채가 바닥에 줄지어 놓여 있었으며 30분 또는 그 이상 동안 계속 됐다’라고 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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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 밥상에는 기생 교육기관인 교방에서 온 기녀가 앉아서 잔심부름을 했다고 한다. 수저를 올리고 반찬을 집어주며 생선 가시를 발라 먹기 좋게 입에 받쳤다. 식사 중에는 반주가 곁들여졌다고 한다.
전라감영 근처에는 관기들, 즉 감영에 속한 기생들을 관리하는 교방청과 장악청이 있었다. '호남읍지'에는 '전주부에 기생 34명 등이 거주했고, 그들은 전라감영의 각종 연희에 참가했으며, 전주의 전통음악 보존을 위해 교방청 중건에도 힘을 합쳤다'는 기록이 있다. '완역 완산지'에는 '정유재란 이후 60년 동안 전주에 교방이 없었는데, 부윤과 관기, 주민들이 힘을 모아 교방 5채를 짓기 위해 노력했다'는 기록이 있다.
황미연 문학박사는 "평양기생과 진주기생, 전주기생이 이름나 있었다"면서 "미색은 평양기생이라면 전주기생은 각종 행사에서 풍류를 선보이며 문화예술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전주기생이 단지 관찰사에서 밥을 떠먹여주거나 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재 전북예술회관 뒷편 모화재 보험 건물이 교방청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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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수(申光洙)의 '樂府上寒碧堂十二曲中 三曲(악부 상 한벽 당십이곡 중 3곡)'을 보면,
전주 색시들은 남장을 좋아하네. 한벽당 속에 검무가 한창이네. 유리빛 푸른 물에 그림자가 떠돌아 한벽당 안에 들려주는 춤 서릿발 같네.
全州兒女學男裝(전주아녀학장) 寒碧堂中劒舞長(한벽당중검무장) 轉到离看不見(전도류리간불견) 滿堂回首氣如霜(당회수기여상)
신광수가 1749년에 지은 이 노래는 전주 검무의 일변을 엿볼수 있다.
이는 전주 검무가 다른 지역의 검무와 변별력이 있다. 시에서 나타나듯이 남장을 하고 춘다. 다시 말해 여기생이 남자 복장으로 춤을 춘 것 같다.
≪호남읍지≫에는 "전주부에 기생 34명 등이 거주했고, 그들은 전라감영의 각종 연희에 참가했으며, 전주의 전통음악 보존을 위해 교방청 중건에도 힘을 합쳤다."는 기록이 있다.
≪완역 완산지≫에는 "정유재란 이후 60년 동안 전주에 교방이 없었는데, 부윤과 관기, 주민들이 힘을 모아 교방 5채를 짓기 위해
노력했다."는 기록이 있다.
전라감영 근처에는 관기들, 즉 감영에 속한 기생들을 관리하는교방청과 장악청이 있었다.
전북지역은 마한시대와 백제를 거쳐 통일신라기 견훤이 전주에후백제를 도읍하였다. 조선왕조 500년을 꽃피운 이성계(전주이씨시조 이한(李翰)의 21세손)의 어진(御眞)과 ≪조선왕조실록>이전주 경기전(慶基殿)에 봉안되어 있다. 그래서 전주를 '천년의 고도', '조선왕조의 발상지'라 부른다.
조선 초기 전주에 설치된 전라감영(全羅監營, 전북기념물 제107호)은 1896년까지 전라남 · 북도를 포함하여 제주도까지 통할하는관청으로 성곽에 둘러싸인 전주부 내에 있었으며, 전주 관아(官衙)가 반대편에 있었다.
전주부(全州府)·광주(光州牧)·순창군(淳昌郡) · 순천좌수영(順天左水營)·무주부(茂朱府)· 제주목(濟州牧)에 각각 교방(敎坊)이 설치되었었다. <≪호남읍지≫(1895)>
전주부는 교방과 장악청광주목은 교방과 교방청, 순,창군은 교방, 순천 좌수영은 기생청, 무주부는 교방청, 제주목은장춘원으로 명칭을 달리 지칭하였다.
무주부 교방에서는 <포구락>·<고무>·<선유락> · <검무>·<승무>·<헌선도> 등 6종의 춤과 이에 수반된 반주, 그리고 소품목록이 보존되어 상당히 큰 규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궁중무였던 <포구락>·<선유락> 등이 지방 교방에서도 연희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궁중무용과 지역 간의 교섭양상을 뚜렷하게 살필 수 있었다. 〈≪호남읍지≫(1895년), ≪茂朱府邑誌≫〉
전북지역에 조선후기까지 전주 • 무주·순창·남원(남원은 기생기록만 있음.)에 설치하였던 '교방(敎坊: 조선시대 여기(妓)를 관장한 기관)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전주와 남원에만 '권번'(番: 일제강점기 기생조합의 일본식 명칭)이 설치됐다. 그리고 남원지역에 교방설치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기생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교방이 존재하지 않았던 군산· 정읍이리(익산) ·부안지역에 권번과 예기조합이 새롭게 설립되었다.
이같은 사실은 근대시기 경제력 약화와 교통망 부족으로 말미암아 무주 · 순창에서 교방이 사라지게 되었고, 반면에 일제강점기 경제 중심지로 급부상한 군산, 그리고 호남선과 전라선의 역이 개설되면서 은행이 설립되는 등 경제형 도시로 탈바꿈한 익산과 정읍에 예기조합 내지 권번이 설치됐다.
1916년의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령 제3호 <요리 음식점 영업취체규칙>(식품위생법에서 예기(가무, 서화, 시문 등 예능을 익혀 손님을 접대하는 기생)·작부술접대부) · 예기치옥(屋: 예기들의 거처사옥) 등 요릿집 위생관련 법안규칙에서 기녀들을 명시한 법령이 나타난다..
당시 전주에는 1915년에 예기조합(合), 1923년에 전주권번이 설립되었고, 군산에서는 1923년에 군산 예기치옥(藝妓置屋),
남원은 1926년 예기조합과 권번(券)이란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정읍은 1928년 예기조합, 이리(익산)는 1929년 기생조합, 1939년 예기조합이란 명칭으로 각각 설립되어 활동하였다.
반면 광주기생조합은 1917년 경에 만들어졌다.
일제 강점기 '권번(券番)'이라는 기생조합이 있었다.
권번 기생들은 술과 웃음을 파는 일반 기생들과 달리 혹독한 훈련과 교육을 견뎌내며 시(詩)·화(畵)·가(歌)·무(舞)·악(樂) 등 예능뿐만 아니라 교양과 예의까지 갖춘 "예인(藝人)'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권번은 고등 예술 교육기관이고 권번 기생은 예술인인 셈이다.
이런 권번의 역사적 가치를 알리고 전통 문화예술을 교육하는 체험관이 있어 눈길을 끈다.
2015년 전북 정읍시 산외면에 설립된 '고택문화체험관(옛 권번문화예술원)'이 바로 그 주인공.
2000년대 중반 광주 권번이 허물어질 처지에 놓이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단법인 한옥마을사람들 고혜선 대표가 광주 권번 상량문 등을 그대로 넘겨받았다.
이후 권번에 대한 편견으로 건물 이축에 필요한 예산 확보에 난항을 겪다가 2015년 광주 권번 한옥 건물을 해체, 산외면으로 옮겨와 원형 그대로 다시 지었다.
국비와 시비 등 21억원이 투자됐고 부지와 건물을 포함한 전체 면적은 3천400㎡에 이른다.
외형은 전통한옥으로 안채와 사랑·행랑채, 별채로 구분돼 있으며 내부는 숙박을 위한 편의시설과 전통문화예술 체험공간으로 꾸며졌다.
이곳에선 아리랑과 단가, 정가, 전통예절, 전통음식, 다례, 전통무용·악기 등을 교육한다. 강의는 예술원 강사가 맡는다.
전통문화의 신명과 풍류를 결합해 현대인의 감성에 맞는 여가문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문화예술 체험과 숙박을 할 수 있다.
2019년 '예기(藝妓)들의 흔적을 찾아서'란 주제로 역사와 기억 속에서 사라진 교방(敎坊) 문화를 소개했다.
'조선미인보감' 기록을 보면 1923년 당시 전주 권번의 기생규모는 최소 50명은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북 출신으로 서울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녀들은 한성권번에 조추월(秋月)과 조산월山月), 신취옥(玉) 등이 있었으며, 한남권번에는 장옥주(張玉), 송경주(珠), 조산옥(玉)이 활동하였다. 전북 출신의 기생들은 고향에서 기예능을 익힌 후 경성에 진출한 것이다.
이들은 궁중춤(呈才)보다 <승무>·<살풀이춤>・<입춤>. <검무>·<화관무> 등의 민속춤을 주로 추었다는 이병옥 용인대 명예교수의 설명이다.
황미연 문학박사는 “평양기생과 진주기생, 전주기생이 이름나 있었다"면서 "미색은 평양기생이라면 전주기생은 각종 행사에서 풍류를 선보이며 문화예술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남공철(1760-1840)은 한벽당에서 연행된 검무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붉은 치장 가볍게 들고 도는 춤 / 전립에 바람 불리고 가슴엔옥전을 찼는데 / 엇바뀌 추는 춤 봄나비 촛불을 맞보내는 듯 낮았다높았다 가을제비 화려한 잔치 휘젓는 듯 / 멈칫 손 내리니 날씨개이자 우레 멈추듯/금시 허리 돌리닌 안개가 걷히의 검무가 전해진 것이라지만 / 오히려 장욱이 글씨 배우든 생각을하지(≪금륭집≫ 2권)'
'공손(孫)은 당나라 떼 검기무에 능했던 '공손대낭(公孫大娘을 말한다.
개원(開元) 연간 검기혼탈무(劍舞)를 잘 추기로 유명했던여자다.
그에 대한 기록이 ≪명황잡록(明皇雜錄)≫에 “이때 공손대랑은칼춤을 잘 추어 향리(鄕里曲) 및 배장군만당세(裵將軍滿堂勢),서하검기혼탈(西河劍)을 잘 했는데 춤추는 기예가 아름답고 묘해 모두 이 시대의 으뜸이었다."고 전한다.
궁중과 지방의 교방에서 검무를 출 때에는 전립을 쓰고 전복과전대의 복식을 갖추고 춘다. 하지만 남장을 하고 추었지만 흔적조차 없다.
한편 일본에서 온 유곽이 전주 등 지역에 있었다.
전주 유곽
이종근의 행복산책
2019. 3. 25. 16:51
전주 다가교를 지나면 도토릿골교, 구 진북교, 쌍다리(어은1교) 어은교(어은2교), 진북교, 서신교, 백제교, 사평교, 가련교, 추천교가 잇따라 모습을 드러낸다. 도토릿골과 어은교 사이에 길게 뻗어내린 산자락 부근에 일본인 작부들이 기거하는 유곽이 들어섰다는 김남규선생의 기록이 보인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 말로는 도토릿골 쪽 유곽에 가려면 배를 타고 건너야 했으며 그래서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당시 방귀 꽤나 뀌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곳에 유곽이 생긴 것은 왜인들이 전주부성의 서문과 부근의 성벽들을 허물고 형성한 근대적 도시 공간의 끝부분에 자신들을 위한 욕망의 배설 창구를 만든 까닭이다.
‘유곽(遊廓)’은 본래 일본어로서 유카쿠가 원 발음이다. 유곽(遊郭)이라고도 쓴다. 예전에, 관의 허가를 받아 일하는 창녀들을 두고 손님을 맞아 매음 행위를 하게 하는 집이나 그 집들이 모여 있는 구역을 이르던 말이다. 그 주위를 도랑이나 울타리로 에워싸고 출입구를 한 곳으로 제한하여 외부와의 관계를 차단한 경우가 많았던 것에서 비롯한다.
1930년대 군산에는 신흥동(군산역) 인근에 유곽이 6곳이 자리한 가운데 60여 명의 성매매여성이 활동했다고 한다. 전주에 성매매업소 집결지가 들어선 것은 1930년대 전주부 상생정(소세이죠, 전주역이 자리함 현재의 태평동)에 들어섰던 ‘유곽’이 시초였다고 한다.
이곳에 유곽이 들어선 배경은 호남권 최대의 재래시장이었던 중앙시장과 전주역이 인근에 있었던 때문같다. 조선인과 일본인 접대부가 절반 정도씩 50명 정도가 5곳의 유곽에서 영업했던 상생정 유곽에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 때문에 전주 유곽은 제법 돈이 있는 사람들만 드나들었던 곳이었다. 그렇게 진북동 동국아파트 자리와 태평동 SK아파트자리와 상진신협 근처 등 소규모 유곽이 들어서기도 했다.
전주시 다가동 3가 중앙길 174번지와 156번지 사이 골목 앞에 2m 간격을 두고 쌍으로 돌기둥이 서 있다. 도로명으로는 전라감영1길 17ㅡ14로, 선명인쇄사 바로 옆이다. 살아 생전, 서예가 작촌 조병희(1910~2005)선생은 필자에게 이곳이 일제 강점기 시절 유곽이었고 돌기둥은 그 표시라고 설명했다. 밤이면 때론 청사초롱이 걸려 있어 지나가는 남성들을 유혹했다고 했다. 어느 누구는 애시당초 중앙동, 다가동 근방에 유곽이 있었고, 후에 그것이 현재 전주초등학교 근방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의 증언대로라면 이 돌기둥은 옮기기 전의 다가동 유곽을 표시하는 '물건'이니 그 내력이 적게 잡아도 90~100년이다. 이젠 성매매 특별법으로 인해 찬바람이 불고 있지만 옛 영욕으로서 전주 유곽의 역사는 쉽게 잊히지 않을 터이다./이종근(문화교육부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