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천 하상(河床)의 변천과 저수지
전주천 하상(河床)의 변천
옛 하천의 줄기는 한벽당 아래로부터 이목대.오목대의 아래를 둘러 지금 기린로와 대략 같이 흘러 곧바로 덕진연못을 거쳐 추천으로 흘러 내려간 시대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1939년 한발 때에 덕진연못의 북서쪽 모퉁이 연못 아래를 지하 10척 정도를 팠을 때 암반이 나타났는데 그 사이 많은 냇돌을 파 올렸던 사실이 있었다.
이후 덕진연못은 전주천이 서천(西遷) 후에 전주 건방(乾方)의 공허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쌍아 올려 부근의 물을 담아 관개(灌漑)하면서 유람도 할 수 있는 일거삼득의 효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덕진연못과 전군도로와의 사이에 있는 밭은 지하 1미터만 파더라도 하천의 모래 층이 나타난다.
전주천의 서천(西遷)과 시가지의 이동
<완산지>에 의하면 옛날 전주를 다스리던 곳이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있었는데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쪽을 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남천이 옛날에는 오목대 아래로 흘렀는데 민가를 파보면 왕왕 모두 냇돌이 나오니 옛날에 물이 흐르던 곳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견훤산성에서 기린봉를 거쳐 문화촌이라 불리는 옛 인봉리를 지나 서노송동 구형무소 자리에 이른 능선 자락 현재 진북동 우성아파트를 있는 능선에 견훤의 고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고려때 조선시대와 같은 지역에 성이 수축된 것으로 보여지므로 전주천의 하상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은 고려이전의 일로 추정된다.
즉, 려말선초 경에는 옛날 선창가(商埠地)가 시가의 주요부가 되고 낮은 지대가 발달하여 돌 성벽이 쌓여지면서 치소의 방향이 남향으로 바뀌기에 이른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다음과 같은 흥미 깊은 이야기도 있다.
전주시가의 가택은 옛날 동으로 산을 등지고 서쪽을 향하였는데, 그 당시의 전주는 재물은 풍부하지 못하였지만 좋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남향으로 세운 뒤부터는 반대로 바뀌어 재물은 풍부한데 좋은 인재를 배출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 남향함에 따라 북쪽이 허하게 되어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가 전주부성의 기맥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건방(乾方, 북쪽)을 막기 위해 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KBS 산 사이에 잡림지를 설치했다고 한다. <계속>
전주천의 홍수와 제방공사
<호남읍지>에 의하면 1509년 6,000척에 달하는 제방을 수축했다고 하며, 1731년에는 전주부윤 이수항이 승군을 동원하여 수축하였으며, 1784년에는 관찰사 조시위가 대규모로 제방을 수축하였다.
1901년 관찰사 조한국이 개축을 실시하였다.
수차례의 제방 공사가 있었지만 일본에 강점된 즈음 전주 사진을 보면 제방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1920년 대홍수로 13명이 사망하고 546채의 가옥이 파괴되었다.
이후 1932년 완산교에서 상류쪽으로 339M의 제방을 준공하였고, 1933년에는 전주교 하류 좌우 제방 576M를 시공하여 쌓았다.
이듬해 400M를 확장하였고 1936년까지 668M를 추가로 완공할 계획이었으나 1936년 대홍수를 만나 쌓아놓은 제방마져 대부분 유실되었다.
1936년 대홍수 때는 4시간 동안 무려 188mm를 퍼붓는 강우로 인해 전주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다리도 무너져 버렸다.
1937년 총 32만2천8백여원을 들여 좌우 제방 총연장 8400m를 축조하였으며 다가교 아래에는 보트장을 시설하기도 했다. 이때 쌓은 제방은 폭을 90m로 넓히고 높이 역시 1m를 올려 하상과 6m의 높이로 축조 되었다.
전주천의 뱃놀이
전주천에도 과거 배를 띄우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구 전주극장 서쪽 모퉁이에 옛날에 대공손수(大公孫樹)라는 큰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에 배를 매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전주에서도 뱃놀이를 했다는 것은 그리 과장된 사실만은 아니다.
영조조 관찰사 홍낙인의 패서문루기(沛西門樓記)를 보면,
"성의 문루에 올라 내다보면 - 중략 - 배와 달구지가 서로 함께 나란히 미치는 곳(今從門樓而望焉 山之高也 水之深也 稼穡之豊歉也 謠俗之美惡也 冠蓋之所相接也 舟車之竝臻也)" 이라 하여 서문 밖의 풍경에 뱃놀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서문 밖 기전여자대학과 어은골 사이의 마을 명칭이 배마을(舟洞)인 것으로 미루어도, 전주천에 떠 있는 배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한편, 오목대 북서쪽 모퉁이의 벼랑에 급격한 경사면이 있는데, 이곳은 옛날 벼랑 밑에 배를 대고 언덕길의 계단을 밟고 오목대에 오른 유적이라고 한다. 지금도 그곳 우묵한 곳의 흙더미를 들추면 많은 가와편이 나타난다고 한다.
전주 속의 연못
호남 제일의 미곡산지지만 강수량이 적기 때문에 곳곳에 제언(연못)을 만들어 용수를 가둬두었는데, 과거 전주부에는 크고 작은 제언이 56개소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전주에는 인봉지, 덕진지를 비롯 4~5개의 제언이 남아 있다.
ㅇ 인봉지(麟峯池) : 언제 만들어 졌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덕진지와 마찬가지로 전주의 허한 북동쪽을 막기 위해서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고종대에 전라도 관찰사 김성근이 전주의 북쪽에 있는 밭의 한해를 구제하기 위해 이 연못을 수축하고 연못 가운데 1칸6각의 정자를 지어 일육정이라 하고 연못에 배를 띄워 축연하였다고 한다.
ㅇ 현무지(玄武池) : 옛 전주부성의 북동 모퉁이 옛 전라북도 2청사 부근으로 추정된다. 호남읍지에 의하면 조선 정조대에 판관 윤광수가 전주의 기맥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진북정의 북쪽 백보되는 곳에 둘래 338척의 연못을 파 북방수호신의 이름인 현무를 따서 현무지라 하였다고 한다.
ㅇ 무채제(舞彩提) : 기린봉 북서쪽에서 발원한 물이 옛 성황사 밑을 지나 인후동 옛 진안방면 도로의 남쪽에 위치한 넓이는 2,740평의 무채제에 도달한 뒤, 모래내(沙川)를 흘러 전주천으로 합류한다.
이외에 초제(草提 ; 둘레 607척), 영사제(靈사提 ; 둘레 1,000척), 백동제(栢棟提 ; 둘레 1,000척) 등이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