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연재물, [김스미의 미술산책] <7>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역사와 문명이 늘 발전되는 것은 아니다. 흘러간 시간을 기반으로 새바람이 불지만, 그 바람이 훈풍일 수만은 없다. 완전무결한 전투력을 자랑하는 천하무적 레지스탕스가 폭군들을 일거에 물리치고 승리하는 건 무협지 스릴러 한 장면일 뿐이다. 현실은 다르다. 그 누군가는 아프게 희생되고 민중의 목소리가 각성의 시간이 될 때 가슴속에 다가오는 조용한 승리를 느낄 수 있으면 그것이 진보다. 진보의 자리는 언제나 약자 편이어야 하고 음지에 있을 때 더욱 빛나는 이유다.
혼란의 시대, 목표와 가야 할 길을 밝혀 주는 존재가 반드시 있다. 무수한 등불 가운데 유독 빛나는 이가 있으니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위대한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다.
많은 화가가 발표한 걸작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관객은 사는 시대와 본인의 기질에 따라 작품 선호가 각기 다르다. 그래서 그림은 ‘그냥 바라보세요’ 하는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인간이 영광을 위해서 희생한 꿈과 영혼의 울림을 암시적인 사유로 정확히 끌어 준 천재다. 동시대 화가들이 그를 이해할 수 있었나 궁금하다.
지면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프랑스의 1930년 7월 혁명에서 영감을 얻은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 화풍의 마지막 작품이다. 7월 혁명은 혁명당원들이 자유주의를 억압하고 귀족을 보호하는 정치를 한 샤를 10세를 폐위하고 루이 필리프가 즉위한 사건이다. 들라크루아는 ‘조국을 위해 직접 싸우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림을 그릴 수는 있다’라고 형에게 편지를 쓴다. 루이 필리프마저도 민중을 선동할 가능성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이 그림을 즉시 구입했다는 후일담이다.
혁명의 연기가 자욱한 거리에 군인과 노동자의 주검을 딛고 민중을 이끄는 여인이 있다. 한 손에 장총, 한 손에 자유 평등 박애의 공화국 삼색기를 들었다. 자유와 이성을 상징하는 알레고리인 고대 마리안의 프리기안 모자를 쓴 여인, 맨발에 상반신을 드러내고 격렬한 몸동작이다. 멀리 노트르담 성당에 삼색기가 펄럭이고 바리케이트도 무너졌다. 권총을 든 소년의 분노에 찬 눈동자, 중절모를 쓴 신사, 노동자도 농민도 하나의 결기로 뭉쳤다. 그녀는 실체가 아니다. 그녀의 이름은 인류의 위대한 권리이자 로망인 자유라는 두 글자다.
들라크루아는 한쪽만을 편들지 않았다. 죽음과 약탈, 빈부 차이 불평등 등 혁명의 민낯을 그려서 우리가 무엇을 잃고 얻었는지 사유하게 한다.
낭만주의는 이성주의의 반어로 인간의 감성적인 본질을 우선하는 사조다.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은 단순한 객기나 막연한 낭만이 아니다. 깊은 지성과 철학적 사유가 배경이다. 한때 공부로는 명함도 못 내민다. 창작 기술이 반드시 상상력이 되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플러스 알파인 재능까지도 타고나야 하니 예술가의 길은 험준하기가 히말라야 오르기다.
들라크루아의 찬란한 빛과 강렬한 색채의 이미지를 가진 작품이 당연히 빛날 수밖에 없다. 그의 생각은 엉뚱한 판타지가 아니며 진지하고 적극적인 감정의 자기 노출이다.
오늘 우리에게 자유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과 부당한 것에 저항하는 보편적 열망도 모양은 다르지만 그대로다. 작품 주제도 인간 영혼의 자유에 대한 외침이 대다수다. 과학이 발달하여 사는 형편은 나아졌지만, 인간의 의식이 발전됐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화가 김스미
저작권:<Liberty Leading the People> 1830, 캔버스에 유채, 260x325cm, 루브르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