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스토리

석지 채용신, 전주선비 전우와 최병심의 초상을 그리다

이종근의 행복산책 2022. 11. 26. 08:53

석지 채용신, 전주선비 전우와 최병심의 초상을 그리다

'호남 3재(三齋)’는 간재(艮齋) 전우(1841-1922)의 제자로, 근·현대 호남 유학을 대표해온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 1874~1957),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 1877~1960),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 1882~1956)을 말합니다.

이들의 스승인 간재는 "금재는 나에 못지않은 학자이며, 그의 학문을 조선에서도 따를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최병심은 일제 식민지배 강화로 우리 정신과 문화적 유산이 말살될 위기에 처하자 이를 계승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전주 옥류동(玉流洞, 교동)에 ‘옥류정사(玉流精舍)'란 서당을 열고 자신이 강학하던 곳을 ‘염수당(念修堂)’이라 했습니다. 

일제가 전라선 철로개설을 구실로 한벽당을 헐어버리려 하자 그는 이에 강력히 항거하며 한벽당을 지켜냈습니다. 

그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보여주는 '염재야록'의 서문을 썼으며, 이로 인해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

 시경 대아(大雅)의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 그 덕을 닦으라  無念爾祖 聿修厥德'라 했듯이  '염수(念修)'는 '조상을 생각하고 덕을 닦으라'는 의미입니다.

최근들어 간재 전우와 금재 최병심이 오고간 편지를 적은 '간재척독(艮齋尺牘)
책독)' 복사본을 석운 김정석선생으로부터 무상으로 기증받았습니다.

이 책에 이들의 초상이 있었는데요. 석지 채용신의 것이 분명합니다.

 최병심의 초상은   왼편에 채용신이 그렸음이 드러나며, 이때 최병심은 54세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조선시대 마지막 어용화사(임금의 어진을 그린 화가) 석지 채용신(蔡龍臣, 1850∼1941).  그는 무과출신 관료이면서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을 제작 총괄하는 우두머리화가인 주관화사를 역임했습니다. 그는 서울 출신이지만 전북 지역과 인연이 깊습니다. 

조상 대대로 전북 지역에서 생활했고, 낙향 후에도 전주와 익산, 정읍 등에서 화실을 열고 활동하며, 무수히 많은 인물들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고종의 어진 제작 후, 직접 변산의 채석강에서 유래해  ‘석강(石江)’이라는 호를 선물했다고 하니, 채용신과 고종의 관계가 각별했음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종근은 54세에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