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스토리

홍재일기, 폐군현(廢郡縣) ‘고부군(古阜郡)’을 다시 생각하다

이종근의 행복산책 2022. 11. 25. 21:26


/김철배(임실군청 학예연구사)





조선시대 ‘고부군’은 현재 정읍시 고부면으로 남아 있다. 고부면에는 옛 고부군 관아와 향교가 그대로 있어서 한 때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 세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위축되었다. 1914년 고부군, 태인현, 정읍현이 합쳐져 정읍군(현 정읍시)이 되었고, 그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중심지가 호남선이 지나가는 정읍시로 옮겨지면서 고부군과 태인현은 정읍시의 변방으로 밀려나는 결과를 낳았다.

1914년 고부군은 행정구역 개편과정에서 폐군되었다. 그 원인으로 거론되는 것은 고부가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의 일이고 고부군의 폐군은 1914년의 일이니 만일 고부군이 폐군이 되어야 했다면 당시 조선 왕실에서 즉시 폐군할 만한 일이었다. 관련 기사가 없다. 군현의 읍호가 강등되는 경우는 보통 강상죄(綱常罪), 반역죄(反逆罪) 등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이와 비교하면 1894년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 지금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당시 민란이 전국적으로 번졌을 때 그 시초에 해당하는 고부에 대해서 곧바로 강등조치로 이어졌어야 했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당대 인식이 봉기이거나 민란이었다는 점에서 읍호(邑號)가 강등될 가능성이 높았다. 반역이나 강상, 민란과 같은 중대범죄는 의금부에서 관할하였다. 특히 강상죄는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거스르는 범죄로, 강상의 근간인 효(孝)와 충(忠)을 거스르는 불충, 불효의 범죄행위를 의미한다. 이를 확대하면 노비와 주인, 양반과 상민, 고주(故主)와 고공(雇工), 임금과 신하, 부부, 친구 등 모든 상하관계에 적용되는 것이었다. 조선 왕실은 특히 강상을 나라를 다스리는 근간으로 여겼던 것인데 동학농민혁명이 한창이던 1894년 7월 12일('고종실록'), 소위 갑오개혁을 주관하였던 군국기무처의 결정에 따르면 의금부가 사라지면서 공식적으로 강상죄와 반역죄가 사라져 버렸다.

'홍재일기'에서 고부군 혁파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기사 하나를 찾았다. '홍재일기' 5책 1894년 11월 26일 “동학인 전봉준(全琒凖)과 김기범(金基凡, 김개남)이 모두 패하여 달아나 원평에 이르렀고, 경군(京軍)과 삼도(三道)의 병사를 아울러 6만 8천명에 이르렀는데 전라감영으로 들어가며 한 갈래는 김제 만경에 이르고, 한 갈래는 금구 원평에 이르러 동학군에게 크게 패하였다고 한다. 대장 신정희, 남원부사 이용헌이 동학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므로 그 동생이 복수장군(復讎將軍)으로서 병사를 이끌고 내려왔고 대구 중군 박항래도 복수장군으로서 병사를 이끌고 내려왔다고 한다. 고부 신관양필환(梁弼換)은 동학에게 해를 입었는데 그 고을의 향리와 민간에서 그 시신을 거두지 않았으므로 그 고을을 도륙하고 그 고을의 이름을 혁파했다고 한다.” 고부군 혁파 소문과 관련하여 '홍재일기' 1895년 5월 23일 일기에서 다음과 같은 추가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순상이 대소 민인을 동헌의 군문 안으로 초치하여 위로하며 타이르기를 “난리를 겪으면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동학난(東學亂) 외에 다시는 난리가 없을 것이니 안심하고 본업에 힘써야 할 것이다. 세미는 1결에 24냥이고, 호포는 봄가을에 3냥 외에 다른 잡역은 없을 것이다. 올해 미납한 조목 1섬에 15냥은 없애주겠다. 고부속읍장(古阜屬邑狀)에 대한 제사(題辭)에 ‘조령(朝令)을 보지도 않고 다만 길에서 떠도는 말을 빙자하여 소장을 올리니 온당한 일인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위 일기의 ‘고부속읍장(古阜屬邑狀)’이라는 표현은 ‘고부를 읍에 소속시키는 글’ 정도로 이해된다. 물론 글의 내용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으나, 이 글에 대한 답변, 즉 고을 현감의 데김에 “조령을 보지도 않고 다만 길에서 떠도는 말을 빙자하여 소장을 올리니 온당한 일인지 모르겠다.”라고 한 것을 보면, 고부군을 혁파한다는 소문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