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읍성
고창읍성이 언제쯤 세워졌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성벽에 새겨진 ‘계유소축감동송지민’(癸酉所築監董宋芝玟)이라는 표석으로 미루어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적가는 “공사구간마다 동원된 장정의 고을 이름이나 감독자의 이름을 새긴 돌이 바로 표석”이라며 “이는 공적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공사를 허술히 해 무너지는 경우엔 책임을 묻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전라도 각 고을에서 동원한 주민들이 성을 쌓으면서 성벽 곳곳에 ‘濟州始(제주시)· 和順始(화순시)· 羅州始(나주시)· 癸酉所築宋芝政(계유소축송지정)’이라는 구역표시를 한 각명이 있는데, 특히 동문 옹성 성벽의 ‘계유소축감동송지민’이라는 각명은 의미가 있다. 또, 성을 쌓은 구간을 표시한 무장시면(茂長始面)·무장종(茂長綜)이라는 각명에서 무장현(지금의 고창군 무장면)은 태종 17년(1417)에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을 통합된 지명이어서 계유소축의 계유년은 1417년~1486년 사이의 계유년 즉 단종 원년(1453)인 계유년에 쌓은 것이 확실하다(사적 제145호)
1965년 사적 제145호로 지정된 고창읍성은 모양성(牟陽城)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성이다. 백제 때 고창 지역을 ‘모량부리’(牟良夫里)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축성 당시에는 동헌과 객사 등 관아건물 22동이 있었으나 크고 작은 전화(戰禍)로 소실됐다. 1976년부터 30여 년에 걸쳐 동헌, 내아, 객사 등 건물 14동이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됐다.
외침방어를 위해 축성한 고창읍성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외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총화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 이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 성과 연계되어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만들어 졌다. 1965년 4월 1일 사적 제 145호로 지정된 이 성의 둘레는 1,684m. 높이 4~6m 면적은 165,858㎡ (50,172평)로 동.서. 북 문과 3개소의 옹성 6개소의 치성(雉城)을 비롯하여 성밖의 해 자(垓字)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축성 당시 에는 동헌과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이 있었으나 병화로 소진 된 것을 1976년부터 성곽과 건물 14동을 복원·정비 하였다.
고창읍성의 축성연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고창 읍성의 관아건물 보수시에 나타난 상량문과 각종 문헌 및 성돌 에 새겨진 글자들을 보면 이 성은 조선 세종 32년(1450)부터 단종 원년(1453)까지 전라좌우도 19개 군·현에서 구간별로 분 담하여 축성한 흔적이 성벽 구간마다 각자(刻字)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무장시면(茂長始面)·무장종(茂長綜)이라는 흔적이 있으며, 동문옹성성벽에는 계유소축감동송지민(癸酉所築監董宋 芝玟)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어서 이를 해석해 보면, 고창읍성 이 계유년에 축조되었으며 무장현이 축성에 참여했다는 증거라 고 볼 수 있다.
고창읍성에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창현성곽조(高敞縣城郭條)에 처음 나타나고 있는데 신증동국 여지승람은 중종 25년(1530)에 간행했으나 단지 증보처에 신증 이라는 두 글자만 표시하였으므로 성종때 왕명에 의하여 김종 직 등이 동국여지승람의 제 2차 수정을 거쳐 탈고한 성종 17년 (1484)이전의 계유년으로 축성연대가 압축된다 할 수 있으며 무장현은 태종 17년(1417)에 무송현과 장사현을 통합하여 무장 현이 되었으므로 계유소축의 계유년은 1417년 이후의 계유년이 되므로 고창읍성은 1453년의 계유년에 축성된 것이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밟으면 병이 없이 오래살고 저승 길엔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때문에 매년 답성행사가 계속되 고 있다. 성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밟아야 효험이 있다고 하며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그중 에서도 엿샛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고 하여 초엿새, 열엿 새, 스무엿새 날에 답성행렬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성을 한바퀴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바퀴돌면 무병장수하며 세바 퀴돌면 극락승천한다고 한다. 성을 돌때는 반드시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세번 돌아야 하고 일정한 지역에 그 돌을 쌓 아두도록 하였다. 특히 윤삼월의 효험을 강조하고 있음도 겨우내 부풀었던 성을 밟아 굳게하기 위함이었을 것이고 머리에 돌을 이게 함으로서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다지게하는 의도에서 였을것이다.
성밟기를 한 후 머리에 이고온 돌을 일정한지역에 쌓아놓게 한 것은 유사시 석전(石戰)에 대비하기위한 유비무환의 예지라 생 각된다. 우리는 이러한 민속놀이를 통해 우리조상의 슬기를 엿 볼 수 있을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동원을 강제하지 않고 스스로 참여시키는 독특한 우리문화의 양상을 엿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