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검한성공파 화순종중, '백천유집' 발간
류함이 1637년 1월 16 의병을 데리고 와 전주에서 숙식을 한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문화류씨 검한성공파 화순종중(회장 류온기)이 '백천유집(지은이 류함, 역주 김균태, 발간 태학사)'을 통해서다.
전남 화순의 환산정(環山亭, 화순군 동면,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35호), 영벽정, 물염정 등 아름다운 누정이 많다.
백천(百泉) 류함(柳涵, 1576-1661)이 병자호란에 화순의병과 함께 청주까지 진군했으나 청(淸)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와 비통함을 달래려고 1637년 화순에 '백천재(百泉齋ㅡ 화순군 화순읍)'와 '환산정'을 짓고 은거한 곳이다. 화순읍에서 동북쪽으로 6㎞의 지점, 국도변의 용생리에서 2㎞ 북으로 가면 동면 서성리에 서성저수지가 있다. 이 저수지의 한가운데 호수를 품은 환산정이 자리하고 있다.
'마당엔 외로운 소나무 섬돌엔 국화
진(晉)나라 율리(栗里) 사는 도연명에게 배웠네 세상이 시끄러워 처음 계획 어긋나니
산수 그윽한 곳에 만년의 정 의탁했네 봄가을의 나뭇잎에도 나이를 잊었지만
마음 속엔 해와 달로 명나라 황제의 명령을 보존했네 날 추워야 늦게 시듦 그 누가 안다고 했나 산 늙은이 세월 따라 불평도 사라지는 걸.(환산정을 짓고서, 環山亭 原韻)'
류함이 지은 한시로, 병자호란 후 현실에 괴로워하며 정자를 지었던 답답한 심정을 볼 수가 있다. 후생 권춘식, 후학 김영준, 9세손 류상철 등의 차운시가 있다.
류함의 저서 '백천유집(百泉遺集)'은 '낙하절창(洛下絶唱)이요, 남중독보(南中獨步)'라 일컬어지는 단아하고 진솔한 시(詩) 그리고 “소박하고 곧아서 세속의 아름답고 화려함이나, 애절하고 기교를 추구하는 자들이 발돋움하며 바랄 바가 아니다”는 평을 받은 문(文) 등 자연을 벗삼은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의 서문은 1855년 8월 '노사학파'의 시조 기정진이 지었다. 외적과 싸워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조정에서 받아들여졌으며, 그의 손자인 송사 기우만은 호남 유림의 종장으로, 고창, 무장, 임실 등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했음이 '송사집(松沙集)'에 기록됐다.
류함은 이괄의 난 때 종손 류집과 모의하고, 정묘호란 때 조카 류응량과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병자호란 때는 화순에서 거의(擧義)해 맹주(盟主)로, 의병을 이끌고 청주까지 올라갔다가 화친의 소식을 듣자 통곡하고, 돌아와서 화순에 환산정을 짓고 은거했다.
'머리 돌려 조선을 보니 한낮이 차갑고 오랑캐 조짐 남은 기운에 서울이 어두운데 어떻게 하면 우리의 단아한 선비 이끌고 가서 결박해 호한(胡韓)을 막하에서 보는구나.(가다가 청주에 이르러 강화 소식을 듣다)
'환산정'이라는 정자 이름은 송나라 문인 구양수가 저주(滁州)태수로 있을 때 지은 ‘취옹정기(醉翁亭記)’라는 시의 첫부분 ‘환저개산야(環滁皆山也)’에서 가져온 것은 아닐까. '산으로 둘러싸인 정자'가 바로 환산(環山)의 의미이리라.
'대나무 별장기(竹窩記)'란 작품이 있는 바, 대나무 침상에 누워 쉬고, 손에 대나무로 엮은 '주역' 책 한 권을 쥐고 세상 시름을 떨쳐 버렸다. 때문에 처음엔 대나무로 방 1칸의 정자를 지었음이리라.
이 정자는 1896년 1차 중건, 1935년 보수, 2010년 2차 중건을 했다.
그는 본관이 문화(文化)이고, 자는 자정(子靜)이며, 경기도 풍양(지금의 양주) 관동정사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그의 호가 왜 '백천(百泉)'일까. '백천재서(百泉齋序)'에 실마리가 보인다.
'객(客)이 와서 내게 묻기를 "그대의 재(齋)의 이름을 '백천(百泉)'으로 한 것은 추부자(鄒夫子, 맹자)의 원천'(源泉)'을 취함인가. 주부자(朱夫子, 주자)의 '한천(寒泉)'의 의미를 본 받은 것인가.(중략) 지금 저 오성(烏城, 화순의 옛 이름) 현의 남쪽에 백천이 있다. 이 물의 발원은 서석산 아래로 이리저리 구불구불 동쪽으로 흘러 합해져 백천이 되었다네. 쫄쫄 소리 내며 섬돌 아래로 들어가서는 나로 하여금 골수를 맑게 하고, 뽀글뽀글 돌 사이에서 솟아 나와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신을 상쾌하게 한다네. 이에 정사(精舍) 두어 칸을 지어서 대개 그 백천의 광경을 취한 것 뿐이네.
북쪽으로 '한산(漢山)'을 바라보면 저문 구름에 짙은 물방울이 처마 끝에 달렸고, 동쪽으로 '오산(烏山)'을 바라보며 아침 했살이 창 밖에서 구르며, 그 나머지 '학도(鶴島)'의 저물녘 안개와 '종산(鍾山)'의 낙조 이 모두가 내 앉은 자리에서 요긴하게 둘러보는 대상이다. 이는 모두 백천의 조역(助役)이라네. 때때로 두서너 친구와 샘가에서 소요하면서 씻도 씻으니 이것이 나의 재(齋)를 명명한 이유일세 라고 했다.
객이 말하기를 "예, 예"하고, 나는 이에 객과 함께 '백천재' 운(韻) 한 절구(絶句)를 지었다'
그렇다면 '백천재 원운(原韻)'를 살펴보자.
'초가집을 새로 짓고 만년 취미 붙였는데
'백천(百泉)'의 물은 솟아 흐르네
처마 끝의 아침 해는 '오잠(烏岑, 지명)'에 오르고
집 밖의 가을 안개 '학도(鶴島, 지명)에 떠 있도다
반세상 먼지 속에 살다가 이제야 도성(城市) 머니
만년에 일어나는 흥취 골짜기 숲에 그윽하다
남쪽에 와서 비로소 몸 쉴 곳을 얻었으니
시냇가 사는 들 늙은이 날마다 노니노라'
류정훈 문화류씨 검한성공파 화순종중 사무국장은 "과거에 지역의 고로들에게 백천재 인근 논 가운데에 '백시암뜰'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선생의 '백천재 8경'을 보면 이곳 일대의 모습이 가히 장관이었음을 알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오늘날 백천재의 모습은 사라져 안타깝다. 하지만 그의 백천재 8경이란 작품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때의 풍광을 주억거리게 만든다.
'백천재 8경
학도의 저녁 안개(鶴島暮煙)
학이 떠나니 섬은 비고 다만 안개뿐이네
성 밖의 사방 하늘 때대로 짙어 가득하네
국사(國師) 진각국사가 가신 자취 기이하게 전하지만
짐짓 숲 속의 안개비로 백년을 가두었네
오잠의 아침 해(烏岑朝旭)
새벽녘 구르 듯 오른 바다 동쪽 끝에
등 뒤로 떠오른 아침 해 '옥루(玉樓, 천상의 白玉樓)'를 바라보네
서생(書生)은 허비할 날 없어야 한다지만
시간은 빠르게도 물과 같이 흐르네
연사(淵寺, 萬淵寺)의 종소리(淵寺曉鍾)
종소리가 '한산(漢山, 萬淵山의 옛 이름으로 羅漢山을 줄여 부름)' 북에서 들려오는데
바람 편에 일시에 지척에서 들리는 듯
작동안(作同安, 중국 동안땅에서 종소리 들으며 전념한다는 의미) 세 글짜 부적처럼 지니고
회옹(晦翁, 주희의 호) 남긴 말씀 이 중에서 깨닫겠네
관아의 새벽 호각(官衙曉角)
동쪽 관아 해 뜰 무렵 새벽빛이 열리자
두어 마디 관각소리 바람에 이끌리어
사람으로 하여금 고향 생각 꿈꾸게 하니
서쪽 서울 바라보지만 머리털은 벌써 하얗네
종산(鍾卦山의 다른 이름)의 낙조(鍾山落照)
산허리 노을이 붉은 빛을 거두고자 하는데
하늘과 땅은 석양 속에 반쯤 들어갔구나
어두워지자 안식도 '시의(時義, 각각 그때의 의리)'를 따르니
주역의 독실하고 공교함을 체득하노라
서석(瑞石, 광주 무등산에 있는 臺이름)의 돌아가는 구름(瑞石歸雲)
첩첩 산중의 뭇 봉우리 누르고
그 사이로 나온 구름 몇 겹인지 묻노라
우레와 비로 생긴 못은 골짜기에 잠겼는데
도도히 흐르니 어느 날에나 용(龍) 따라 가려나
한산의 늦은 단풍(漢山晩楓)
단풍잎의 붉은 빛은 어젯밤 서리 때문인데
산 가득 밝게 비추이니 그림 병풍 빛이라
나그네 수레 멈춤 단풍 사랑 때문인데
감상을 마치니 봉(峯)마다 이미 석양이로세
세해(細海, 옛 지명)의 가을 벼(細海秋稻)
사방 들녘 황금물결 한눈에 바라보니
농삿집에 해야 할 일 짐수레 다루기라
한데 모여 벼 베려고 나서는 날에
저 관아 올라가서 장수하시라 술 드리네'
그는 기축옥사와 임진왜란을 겪은 뒤에 전주에서 김제를 거쳐 화순에 입향했다.
'옛적에 이사해 이곳에 살았는데 전쟁이 끊어진 지 8년 만에 지난 자취 찾으려고 다시 찾아왔으나 송죽만이 그대로 있는 옛 언덕이로세.(백구정 白鷗亭을 지나면서)'
그의 아버지 열역재(悅易齋) 류덕용은 김제에서 효자 정려를 받았다. 백석 류집(1585-1641)은 그의 종손이다. 류집은 김제출신으로 병자호란 때 창의해 출병한 충의로운 학자다. 1626년 청나라의 사신이 조정에 왔을 때 운암(雲巖) 이흥발(李興浡) 등과 더불어 이를 참수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류함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유도·이흥발 등과 함께 창의해 청주에 이르렀으나 이미 화의(和議)가 성립됐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귀향했다.
백천유집의 '병자거의일기' 1636년 12월 26일~29일자에 이 같은 사실이 확인된다. 그는 의병을 데리고 와 전주에서 숙식을 하면서 작품으로 남겼다. 이 때가 1637년 1월 16일이다.
'전주를 지나면서 느낌이 있어'에 '문득 바라보니 전주 또한 고향이로세 옛일을 말하자 한들 상처만 더할 뿐 앞 사람이 닦은 집터엔 벼와 기장만 자라고 선조의 무덤엔 늙은 백양목뿐일세 남토(南土)는 비록 내 자란 곳이 아니지만 서문(西門)에는 일찍이 유랑인들 살던 곳 객창에 기대 고향 가는 꿈에 깨었는데 의구한 전주엔 새벽달만 빛나는구나'
그는 의병활동뿐 아니라 학문과 시문에도 뛰어나, 성리학에 전심하면서 이수광, 정경세 등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면서 이기(理氣)로 문답하고 '사서설(四書說)'을 남겼다. 90세가 넘은 부모를 극진히 모셔 백천효자(百泉孝子)로도 이름이 높아 언동사(彦洞祠)에 배향됐다.
호수 위에 섬처럼 떠있는 환산정에서 서암 절벽의 기암단애(奇巖斷崖)를 배경으로 호숫가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벗 삼아 하루를 보내면서 오늘날 지식인들이 행할 바는 무엇인지를 곰곰 생각해본다.
'동산 가운데 소나무 너를 사랑하노니 밑바탕 뿌리는 늙은 용 같고 높은 절개는 눈서리를 능가하니 부끄러움은 복숭아 자두의 모습이어라'(동산의 소나무)
환산정 앞의 바위틈에 자라고 있는 500년 된 소나무 '백천송(百泉松)
앞에서 지금의 나를 바라본다./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