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이영춘 박사가 기록한 기록물 등록문화재 될 듯
[인문 문화 스토리]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을까?”
-군산 이영춘 박사가 기록한 기록물 등록문화재 될 듯
농촌 보건위생의 선구자로 불리는 쌍천 이영춘(李永春,1903∼1980)박사가 직접 기록한 기록물이 국가등록문화재가 될 전망입니다. 문화재청은 ‘이영춘 농촌위생 진료 기록물’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 예고하고, ‘해관 보고문서(인천, 부산, 원산)’와 ‘유네스코 회관’을 등록 고시했습니다. ‘이영춘 농촌위생 진료 기록물’은 이 박사가 직접 기록한 자혜진료소 일지와 개정중앙병원 일지, 농촌위생연구소 일지 등 관련 기록물 3건입니다. 그가 직접 작성한 농촌위생연구소 일지는 농촌사회에 만연한 기생충, 결핵, 전염병 등으로부터 농민의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펼친 농촌위생사업 활동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의료체계가 구축되기 전 농촌 보건위생 체계를 갖춘 드문 사례로 공중보건 의료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자혜진료소 일지는 1935년 일본인이 경영하는 군산 구마모토 농장의 의료원인 자혜진료소의 소장으로 부임 후 구마모토 농장 소작인 3, 000가구 2만여 명을 대상으로 진료하면서 기록한 기록물입니다. 개정중앙병원 일지는 진료소에서 치료하기 어려운 입원·수술환자를 위해 1947년 설립된 개정중앙병원 진료기록으로, 당시 농촌 주민의 건강상태와 농촌의 의료실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로관련 등록문화재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청강 김영훈 진료기록물(경희대학교한의학박물관 소장)은 청강 김영훈(晴崗金永勳, 1882~1974)은 1904년에 최초의 근대적 한의과대학인 동제의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전국의생대회와 전국 규모의 한의사단체를 결성하는 등 일제강점기 한의학 부흥에 앞장섰던 한의사입니다. 진료기록물은 1914~1974년까지 한국전쟁기간을 제외하고 약 60년 동안 서울 종로에서 보춘의원(普春醫院)을 운영하면서 기록한 진료기록부, 처방전, 필사본 의학서 ‘수세현서(壽世玄書)’ 등 관련 기록물 21건 955점이 포함됩니다.
서재필 진료가운(독립기념관 소장)은 독립운동가 서재필(1864~1951)이 의사로미국에서 활동할 때 착용 한 진료가운입니다. 갑신정변 이후 미국에 망명하여 의사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서재필이 의사로서의 본직을 지녔으나 애국적 열망으로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에 헌신한 의사 서재필의 모습을 입증해 주는 귀중한 유물입니다.
전주예수병원은 의사 마티 잉골드(Mattie B. Ingold, 1867∼1962)가 말을 타고 왕진가는 사진(1898년)을 비롯, 방광내시경(1930년대), 안과용 수술기구(1948년), 설대위(David J. Seel) 박사의 종양심부 치료기록지(1955-1971년) 등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마티 잉골드 일기’는 120년 전에 미국남장로교 선교부에서 대한민국 전주에 파송한 의사 마티 잉골드의 일기를 번역한 책으로 한강 이남 최초 의사인 마티 잉골드의 일기, 진료기록, 주일학교 기록했습니다. 의료와 봉사의 사명에 따라 미국의 모든 안락한 삶을 버리고 고난과 희생을 선택해 1897년 한국 땅에 와 참혹한 민중의 삶과 함께한 벽안의 처녀 의사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등록문화재로 등재될 수 있는 문서가 여럿 보입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30세 처녀 의사 잉골드는 1897년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한강이남 최초의 의사인 잉골드는 이후로 28년간 이곳에서 의사, 전도사, 교사, 문서선교 등 여러 역할을 했는데, 그녀의 업적은 모두가 한강이남 최초의 기록입니다.
잉골드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의 의사로, 선교 의료활동의 뜻을 두고 1897년 전주로 왔습니다. 그녀는 이듬해인 1898년 전주 성문밖 은송리(현재 완산초등학교 부근 등)에 초가집을 마련해 진료소를 열었는데, 지금 전주예수병원의 전신입니다.
잉골드 일기를 몇 대목 살펴보면 “1898년 11월 3일, 진료소에서 첫 진료를 시작했다. 오늘은 지난해에 내가 전주에 도착한 날이다. 첫날에 환자 6명이 와 시작이 좋다” “1898년 9월 1일, 나에게 뼈가 탈골된 8살 먹은 아이를 데려와 처음으로 마취제를 사용해서 수술을 했는데 다행히 성공적이었다” “1900년, 전주성 안에 사는 정부의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사람을 보내 아내를 위한 왕진을 요청했다” “1902년, 나는 6개월 반동안 진료소 문을 열어 환자 1586명을 진료했다. 그리고 시간과 힘이 허락되는 한 더 많은 왕진을 하려고 노력해 52가정에 150차례 왕진을 다녀왔다
처음에는 외국인을 혐오하고 조롱했던 전주 사람들은 잉골드가 아픈 사람을 정성껏 치료하는 모습을 보고 점차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저 여자 의사는 워낙 용해서 아픈 사람을 그저 슬쩍 보기만 해도 환자의 병이 낫는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풍요가 넘치는 미국 땅에서 존경받는 의사로서 모든 세속적 욕망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이땅에 온 잉골드는 이 모든 한계상황을 이겨내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과 희망이 넘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1899년, 시골 마을로 전도여행을 갔을 때에 “이곳에서 사람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주님의 풍성함을 가르치는 것은 큰 기쁨이며 특권이다. 때로 많은 육체적인 괴로움이 있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이 모든 괴로움 또한 기쁨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잉골드 일기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성격이 밝고 아주 예쁜 김 양은 소녀 성경반을 졸업하고, 주일학교 교사가 됐다. 소년 성경반에서 교사를 맡고 있는 박 군은 그녀의 매력에 무릎을 꿇었고 양쪽 부모의 허락을 받아 약혼을 했다. 그들은 당연히 서로에 대해 알기를 원해 결혼 전부터 교제를 했다. 물론 이것은 한국 관습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교육을 받은 청년들은 새로운 풍습을 만들어가고 있다.”
잉골드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1925년, 58세 잉골드는 미국으로 돌아갔고 플로리다에 살면서 마지막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고향인 전주에 있는 집으로 자주 되돌아가곤 한다. 한없이 자비하신 주님은 그곳에 좋은 친구들을 많이 세워주셨다. 그들은 우리에게 다정하게 대했을 뿐만 아니라 기쁨으로 많은 일을 해냈다"
잉골드가 전주에 온 지 125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곳에는 우리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는 모든 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잉골드 일기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기쁨과 슬픔이 교차했던 한 해가 지나 생명책 한 페이지가 새롭게 열렸다. 한 해를 보내면 우리는 슬퍼진다. 한 해동안 해야 할 것들을 하지 못했고, 자기 연민에 빠져 선을 행할 많은 기회를 놓쳤고, 후회할 많은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으며, 그것은 우리 능력 밖의 일이다. 하지만 과거로부터 미래에 도움이 되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처음 마티 잉골드가 전주에 왔을 때 그녀를 구경하러 온 여인들이 “당신은 무엇을 하러 여기에 왔나요?”라는 묻자, 잉골드는 “나는 무엇을 하러 여기에 왔을까?”를 자문했다. 이 아름다운 결실의 계절에 우리는 스스로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을까?”라고 물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옛 예수병원(엠마오사랑병원)과 너싱홈이라 알려진 건물의 문화재 지정이 선행돼야 합니다. 선교사 가옥 등에 대한 개개의 문화재 지정, 기전학교에 대한 역사적 자료 수집, 전통한옥과 벽돌 조적식 건물 축조라는 전통과 외래문화의 수용 등에 대한 학술적 가치를 더해야 합니다.
<사진>왼쪽부터 ‘자혜진료소 일지’ ‘개정중앙병원 일지’ ‘농촌위생연구소 일지’. 잉골드 1898년 진료 모습, 잉골드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