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의 사륜정기와 전주 이야기
[문화인문 스토리] 과학자들은 실패를 실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엔 에디슨, 한국엔 이규보가 있습니다
-이규보와 전주 이야기
이규보(1168~1241)는 1199년 6월
에 무신 집권자인 최충헌을 찬양하는 시를 쓴 후에야 전주목사록 겸 장서기(全州牧司錄兼掌書記)로 부임했습니다. 그러나 동료의 비방을 받아 1년 4개월 만에 파직됐습니다. 그는 변산에 벌목사(伐木使)로 부임해 근무하면서 인연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진안, 고산 등 전북 곳곳을 다니면서 이을 적은 게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입니다.
이규보가 경험한 전주는 좋지 못한 기억이 많나 봅니다. 성황사의 제사를 빙자해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뜯어 착복하는 못된 아전들의 부조리를 은근히 꼬집는 제신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온전하다, 순수하다, 어우르다', 이는 우리말 '온' 한 글자에 담긴 뜻입니다. 한자로 의역하면 '완(完)' 또는 '전(全)'으로 바뀌는데, 여기에 전주 지명의 유래가 담겨 있습니다. 백제시대에는 '완'이 사용된 '완산'이라 불렀고, 삼국을 통일한 경덕왕에 들어서 '전'을 사용한 '전주' 지명을 사용했습니다. 이규보는 전주에 대해 "인물이 번창하고 가옥이 즐비하며 백성의 성품이 질박하지 않고 선비는 행동이 신중하다"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온'에 담긴 뜻이 전주와 통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는 “전주에서 중자산(中子山)이 가장 울창하니, 그 고을에서는 제일 큰 진산(鎭山)이다.”라고 하였고 “소위 완산(完山)이란 산은 나지막한 한 봉우리에 불과할 뿐인데, 한 고을이 이로써 부르게 된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고 기록했습니다.
1. 이규보가 전주로 가는 벗에게
그는 '전주로 가는 벗에게 글을 썼다'.(
與某書記書(여모서기서)
'모월 모일, 모(某)는 선생 족하(足下)께 돈수(頓首)합니다. 전번에 작별하는 일로
저의 봉필(蓬蓽) 속에 왕림해 주셨는데,
술대접도 박하고 날마저 저물어 전별이 후하게 되지 못해서 부끄럽고 후회스럽기 그지없습니다마는, 생각건대 평소에 저의 궁함을 알고 계시어 너무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셨으리라 여겼습니다. 서신을 받고 보니, 고을을 다스리는 데 무엇이 가장 시급한 것인지를 물으셨기에, 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전(傳 옛글)에 이르지 않았는가.
'패전한 장수는 용맹을 말하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저는 고을 다스리기를 끝까지 잘하지 못한 사람인데, 어디다 얼굴을 두고 감히 정사의 완급을 논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대가 나를 어리석어 아는 것이 적다고 여기지 않고, 지나치게 자신을 겸손히 하여 잘하는 체 않으면서,
의심되는 것을 물어 왔는데, 제가 만약 충실하게 고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 남의 친절한 성의에 응답하는 뜻이 되겠습니까.
감히 대략 한마디로써 말씀드리자면, 무릇 고을을 다스리는 요점은 관대와 엄함을 알맞게 하는 데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번에 제가 전주(全州)를 다스릴 적에
자못 가혹하다는 소문이 들릴 때가 많았는데, 도리어 이렇게 말씀드리니 진실로 내가 다스리던 대로의 상태가 아닙니다.
그러나 정사란 한 가지 법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먼저 백성의 성질을 본 다음에, 완급을 참작해서 하는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전주는 옛날의 백제 땅으로, 그 성질이 아주 사나워 관대한 정사로는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억지로 형벌을 쓰게 된 것이요, 본심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속을 모르는 사람들이 오히려 가혹하다는 이름을 붙였습니다.만일 전주 같은 데가 아닌 지방에서 한결같이 엄하면, 백성이 부대끼어 떠나갈 것이요, 한결같이 관대하면 백성이 방자해져서 완만할 것입니다. 오직 그 관대함과 엄함을 섞어서 쓴 뒤에야,신명(神明)같이 두려워하고 부모같이 사랑하게 될 것이니, 백성이 이러하고서 다스려지지 않는 법은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그대도 요량하지 못할 바가 아니지만, 다만 내가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기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행하기가 오직 어렵다' 하였으니,
이 말이 말은 쉽지만, 만일 정사에 실행하려고 하면 이보다 어려운 것이 없을 것이니, 그대는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겸해서 내가 완산(完山)에서 저술한 표ㆍ전(表牋)을 구하시는데, 그 당시에 수습하여 간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록해 보내지 못하니, 너그럽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다만 소용되실 백련지(白鍊紙) 한 봉(封)과 좋은 전죽(箭竹) 40척(隻)으로
우선 노자를 대신합니다. 황공하오며 재배(再拜)합니다'
2. 사륜정기(四輪亭記)
캠핑카의 기원은 15세기 체코의 보헤미안 지방에서 당시 인도에서 넘어온 집시들이 마차위에 집을 얹은 형태가 시초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이보다 300년이나 앞선 캠핑카가 우리나라에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이규보의 '동국이상국문집 권23'에 실려 있는 '사륜정기(四輪亭記)'가 바로 그것입니다.
'승안(承安) 4년(1199년)에 내가 처음으로 그려서 꾀하여 사륜정(四輪亭)을 동산 위에 세우려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전주(全州)로 부임하라는 명이 있어서 이룩하지 못하고
신유년이 지나 전주(全州)로부터 서울에 와서 한가하게 지내던 중 명이 있던 차 지으려고 하였으나 또 어머니의 병환으로 성취하지 못했다.이로 인하여 짓지도 못하고
또 설계한 것까지 잃게 될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기(記)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사륜정(夫四輪亭者(부사륜정자)'이라는 것은 농서자(隴西子*이규보 자신을 의미)가 설계하고 아직 짓지는 못한 것이다. 여름날에 손님과 함께 동산에다 자리를 깔고 누워서 자기도 하고 혹은 앉아서 술잔을 돌리며 바둑도 두고 거문고도 타고 마음 가는 대로 하다가 날이 저물면 파하였으니
이것이 한가한 자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볕을 피하여 그늘로 옮기면서 여러 번 그 자리를 바꾸니 그 까닭으로 거문고나 책ㆍ베개ㆍ대자리ㆍ술병ㆍ바둑판이 사람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지니 자칫 잘못하면 떨어뜨리는 수가 있었다. 이에 비로소 설계해 사륜정을 세우려 하는 것이다. 아이종으로 하여금 끌게 하여 그늘을 따라 나가면 사람과 바둑판ㆍ술병ㆍ베개ㆍ대자리가 모두 한 정자를 따라 동서로 가면 되니 이리저리 옮김에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지금은 비록 성취하지 못하나 뒤에 반드시 지을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그 형상을 갖추어 설명하려 한다. 바퀴를 넷으로 하고, 정자를 그 위에 지었는데 정자의 사방이 6척이고,들보가 둘이며 기둥이 넷이다. 대나무로 서까래를 하고 대자리를 그 위에 덮으니 가볍게 하기 위함이다. 동서가 각각 난간 하나씩이요, 남북이 또한 같다.정자가 사방이 6척이니
그 칸수를 다 합치면 모두가 36척이다.
그림을 그려서 시험해 보면, 세로를 계산하고 가로를 계산하면 모두 6척이다.
그 평방이 바둑판과 같은 것이다. 정자는 판국 안에 또 둘레를 돌아가면서 자[尺]로 헤아려보면 각각 한자 평방으로 바둑판의 정간과 같다. 정간[罫]은 선(線)길 사이의 네모반듯한 정자(井字)이다. 정간이 각각 한 평방 한 척이니 36정간은 곧 36평방 척이다. 여기에 여섯 사람을 앉게 하는데
한 사람이 동쪽에 앉되, 사람마다 네 평방 정간을 차지하고 앉는다. 세로 가로가 모두 두 자인데 두 사람의 분을 총계하면 전부 8평방 척이다. 나머지 네 평방 정간을 쪼개어 둘을 만들면 각각 세로가 두 자이다.두 평방 척에다가는 거문고 하나를 놓는다. 짧은 것이 흠이라면 남쪽 난간에 걸쳐서 반쯤 세워둔다. 거문고를 탈 때에는 무릎에 놓는 것이 반은 된다. 두 평방 척에는 술단지ㆍ술병ㆍ소반ㆍ기명 등을 두는데
동쪽이 모두 12평방 척이다. 서쪽에 앉는 두 명도 또한 그와 같이 하고나머지 4평방 정간은 비워두어서 잠깐씩 왕래하는 자는
반드시 이 길로 다니게 하니 서쪽도 모두 12평방 척이다. 한 사람은 북쪽 4평방 정간 방향에 앉고 주인은 남쪽에 앉는데 또한 그와 같다. 중간 4평방 정간에는 바둑판 하나를 놓으니 남쪽ㆍ북쪽 중간이 모두 12평방 척이다. 서쪽의 한 사람이 조금 앞으로 나와 동쪽의 한 사람과 바둑을 두면
주인은 술잔을 잡고 한 잔씩 부어서 돌려가며 서로 마신다. 안주와 과일 접시는
각각 앉은 틈에다 적당하게 놓는다. 이른바 여섯 사람이란 누구인가. 거문고 타는 자 한 사람, 노래하는 자 한 사람, 시에 능한 승려 한 사람, 바둑 두는 자 두 사람 주인까지 여섯이다. 사람을 한정시켜 앉게 한 것은
뜻이 같은 것을 보임이다. 이 사륜정을 끌 때에 아이종이 힘든 기색이 있으면 주인이 스스로 내려가서 어깨를 내놓고 끈다.
주인이 피곤하면 손님이 교대하여 내려가서 돕는다. 술이 취한 뒤에는 가고 싶은 대로 끈다. 반드시 그늘로만 갈 필요는 없다. 이와 같이 하여 저물 때까지 놀다가 저물면 파하고 다음날에도 또한 그와 같이 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정자의 평방이 6척이라고 말했는데, 그 계산한 뜻은 깨닫기 어려울 것이 없으나 어찌하여 그리도 자세히 따져 계산하여 바둑판 정간으로 비유해 사람을 천박하게 하였는가라고 했다.
이에 대답하기를, ‘하늘이 둥글고 땅이 모난 것은 사람이 모두 아는 바이나 그러나 음양(陰陽)을 말하는 자가 일산과 수레로 비유를 하니 세로 가로의 보(步)ㆍ척(尺)까지 모두 들어 말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만물이 모나고 둥근 데 들어가는 것이 모두 형상과 그릇에 응한다는 것을 논하려 함이다. 지금 이 정자에 사람을 계산하여 앉히는 데 있어 틈과 중간과 가장자리를 빠짐없게 하여 모두 쓰임에 맞도록 하자면 자세하고 곡진하게 계산하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바둑판 정간으로 비유한 것은 그려서 만든 처음에 혼자서 표를 만들어서 현혹되지 않게 하자는 것이요 정성껏 남에게 가르쳐주자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어떤 사람이 또 말하기를, ‘정자를 짓는 데 그 아래에 바퀴를 다는 것이 옛날 제도에 있는가’ 했다. 대답하기를, ‘알맞음을 취할 뿐이니,어찌 반드시 옛것이어야 만하는가. 옛날에 나무에 깃들어 거처할 수가 없으므로 비로소 기둥과 집을 세워 풍우를 막았는데 후세에 이르러 점점 만드는 법이 증가해 나무판자로 쌓은 것을 대(臺)라 하고, 난간을 겹으로 한 것을 사(榭)라고 했으며 집 위에 집을 지은 것을 누(樓)라 하고, 툭 트여서 텅 비고 허창(虛敞)한 것을 정(亭)이라 했으니 모두 그때그때 헤아리고 참작하여 맞는 것을 취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정자의 밑에다 바퀴를 달아서 굴려 옮기는 것을 갖춤에
무엇이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 비록 적당한 것을 취한 것이긴 하지만 어찌 밑은 바퀴로 하고 위는 정자로 한 것은, 뜻이 없겠는가.
바퀴를 굴려 가고 정자 위에 머물러, 때가 행하게 되면 행하고, 그치게 되면 그친다는 뜻이다. 바퀴를 넷으로 한 것은 사계절을 뜻한 것이요,정자를 6척으로 한 것은
육기(六氣)를 나타낸 것이며, 두 들보와 네 기둥은 임금을 대신하여 정사를 도와 사방에 기둥이 된다는 뜻이다. 아, 정자가 이루어진 뒤에 마땅히 뜻이 같은 자를 맞아서 낙성(落成)하게 된다면 각각 시를 짓게 하고 그 자세한 것을 기록하겠지마는 지금은 대강만을 취하여 먼저 친구에게 자랑하고
머리를 들어 성취되기만을 바라노라” 해t다.
신유년(1201년) 5월 일에 적는다.(辛酉五月日記)
'사륜정(四輪亭)'은 이동식 정자로 바퀴를 넷으로 하고 정자를 그 위에 지었는데 정자의 사방이 6척이고 들보가 둘, 기둥이 넷, 대나무로 서까래를 하고 대자리를 그 위에 덮은 형태로 보입니다. 동서남북이 각각 난간 하나씩이요, 정자가 사방이 6척이니, 그 칸수를 다 합치면 모두가 36척 규모입니다.
정자 안에는 거문고를 타는 한 사람, 노래를 부르는 한 사람, 시에 능한 승려(僧) 한 사람, 바둑을 두는 두 사람, 그리고 주인까지 여섯 명이 앉았다. 이규보는 고정된 건축물인 정자가 사시사철 아름다운 경치를 누리는 데 한계가 있고 동행인들이 이를 쫓아 이동하는 데 드는 수고를 덜고자 사륜정을 고안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획기적 발명품은 이동이 가능하도록 한 네 바퀴 달린 정자라는 유례없는 발상 이외에도 정자 내부의 구성원 배치와 그 행태까지 치밀하게 계획한 점이 오랜 기간 누정문화를 공유해 온 동양의 많은 사례와 비교해도 독창적인 면이 충분히 인정됩니다.
상징적 측면에서, 사륜정에 내재한 의미는 도가적(道家的) 사유를 바탕으로 한 자연현상이 보여주는 ‘우주적 질서’로부터 임금을 모시는 ‘신하의 도리’ 등 현실적인 문제까지를 망라하고 있습니다.
종합하여 보면, 사륜정은 이규보의 문학적 상상력의 결과물입니다. 즉 그의 학문과 철학, 개성이 반영되어 일찍이 시도된 바 없는 새로운 개념의 정원 시설을 창조한 것입니다. 이것을 요약하여 이규보의 ‘실험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이규보는 그 자신의 문장에 대해서는 “나는 옛 사람을 답습하지 않고 신의(新意)를 창출했다”고 했으며, 사륜정에 대해서는 “취미에 맞도록 할 뿐이지, 어찌 반드시 옛것이어야 하겠는가?”라고 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실험정신’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의문시 될 수도 있는 사륜정의 ‘실현 가능성’이나 ‘실용성’을 뛰어넘는 ‘발상의 전환’이란 가치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위대한 발명가 에디슨은 텅스텐으로 필라멘트를 만들기 전에 많은 실패를 경험했습다. 하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에디슨은 자신이 오래가고 내구성이 있는 필라멘트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할 때까지 1000번 이상 실패했습니다. 친구가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에디슨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실패도 일이 진행되는 과정의 하나일세. 실패할 때마다 나는 전구를 만들지 못하는 방법 하나를 발견하는데 성공한 것이지"
에디슨이라고 해서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실패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런 그가 수많은 실패를 극복하고 세기적인 ‘발명왕’이 된 비결은 무엇일까요.
-실패는 인정하지만 패배감에 빠지지 않는다
-실패할 위험을 감수한다
-실패를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_실패를 배움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분명히 천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천재에 앞서 '호기심 천사'였음을 더 기억해야 합니다. 에디슨에게서 찾아야 할 교훈은 그의 말에 잘 녹아 있습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이규보의 '사륜정'은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벗들과 산수의 즐거움을 마음껏 향유하고 싶었던 선비의 이상향까지 담고 있어 최고의 캠핑카라 할 만합니다. 사륜정을 고안해 명승에 머무르며, 자리 배치에 따른 선조들의 역할놀이를 되새겨보는 건 어떨까요.
과학자들은 실패를 실험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