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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사진들을 넘기다 보면 오래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에 빠진다’ 유백영 사진전-임피역에서

이종근의 행복산책 2022. 6. 9. 17:32

사진가 유백영이 726일부터 87일까지 서학동사진예술관에서 개인전 유백영의 길을 갖는다.

눈 덮인 임피역, 할아버자와 외손녀가 기차 굴을 나란히 걷고 있는 사진, 자전터 타고 온 사람이 철도 건널목에서 잠시 멈춤’, 그리고 청보리밭으로 가는 화물 열차 등 오늘, 기억이라는 수 많은 인생의 정류장에서 마치 간이역처럼 잊혀져 가고 낡고 또 닳아 없어져가는 누군가가 내 곁에 있는지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어렸을 적 기차역은 단순히 열차를 타고 내리는 곳이 아니었다. 한 고장의 삶과 꿈이 녹아 있는 시작과 끝(始終)의 공간이었다. 보따리 한가득 장에 내다팔 것들을 실은 어머니들에게는 가족의 하루 끼니를 책임지는 중요한 출발점이었고, 고향을 떠나 상경하던 젊은이들에게는 꿈의 시작이었다. 시작하는 이들에게 그 곳은 꿈의 출발점이었고, 결과가 어찌 됐든 도착하는 이들에게는 고향의 따뜻함을 느끼게 해 주는 첫 풍경, 첫번째 공간이었다. 지금은 퇴락한 채 서 있는 간이역이지만, 단순히 벽돌건물 한 채의 쓸쓸함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커다란 의미가 있다.

임피(간이)역은 간다온다 말없이 훌훌 떠나 이산저산 사철가 목놓아 부르며 역으로 살아온 길 반추하게 만드는 우리 삶 녹색 쉼표의 약칭이다. 군산선과 임피역은 일제강점기 식량 수탈의 상징이었다. 당시, 기차는 전북지역에서 생산된 곡식을 가득 싣고 뿌연 연기와 굉음을 내뱉으며 임피역을 지나 군산항까지 달렸다. 군산항엔 미곡 창고들이 늘어났고, 인근 장미동(藏米洞)이란 지명에 그 수난사가 담겨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시절 호남평야의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지은 군산선의 간이역 중 하나이다. 멀리서 외관만 봐도 딱 오래돼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는 지금의 임피역은 1910년대 후반에 지어졌고, 1936년에 개축할 당시의 건물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으로 알려진 익산 춘포역 다음으로 오래된 역이다. 일제시대 수탈의 역사와 아픔이 남아있는 역이지만 광복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며, 군산의 경공업이 발달하면서 이 지역의 학생과 직장인들에게는 통학 열차 및 통근열차를 타고 내리는 중요한 교통 요충지 역할을 했다.

임피역은 광복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임피 사람들의 공간이. 군산지역 공장에 취직한 청년들은 통근 열차를 타고 나가 열심히 돈을 벌었고, 학생들은 통학 열차를 타고 군산 익산 전주로 나가 청운의 꿈을 키웠다. 여인들은 새벽 열차를 타고 군산항에 나가 생선과 젓갈을 구입해 내다 팔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다른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군산선 이용객은 부쩍 줄었다. 그 여파로 2006년 임피역에서 역무원이 사라졌다. 이어 20081월 말 통근 열차가 없어지더니 그해 5월 임피역의 열차 운행이 완전히 중단됐다.

2000년대 후반, 마지막 통근열차를 이후로 더 이상 운행하지 않으면서 폐역이 됐지만, 역사 내부는 마치 역무원, 승객 등 타임머신을 타고 50~60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한 친근한 느낌의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지금은 남아있는 역 건물의 역사적 건축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근대유산 등록문화재 제208호로 지정돼 관리를 받고 있다. 역 외부에는 이 지역 출신의 소설가인 채만식 선생의 문학기행과 연계해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을 모티브로 한 조형물들이 설치돼 있다.

"간이역은 아련함의 장소이며 여기를 스쳐갔던 사람들과 함께하는 살아있는 사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순간 포착의 묘미를 깨달은 김씨는 휴일만 되면 가방을 둘러메고 전국의 간이역을 떠돌며 셔터를 눌렀습니다. 무인역, 철거된 역, 페인트가 벗겨진 역 등 쇠락한 간이역이 굴곡진 인생사와 무척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사진은 옛것에 대한 애정이 잔뜩 묻어 있다는 평가와 함께 다큐멘터리 사진의 미학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작품들은 한 장의 사진에 머물지 않는다. 흑백사진들을 넘기다 보면 오래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에 빠진다. '추억을 추억 그 이상으로 표현하고 싶다.' 그가 사진을 찍으면서 되뇌는 말이다.

임피역에 가면 그 흔적들이 잘 남아 있다. 1936년에 지은 역 건물은 단순하다. 경사면 두 개가 서로 맞닿아 있는 맞배지붕 모양이기에 멀리서 보아도 반듯하고 단정하다. 역무실 공간에는 책상 타자기 금고 등 예전에 사용했던 이런저런 것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역 건물 옆에는 붉은 철탑 모양의 오포대가 우뚝 서 있다. 시계가 귀하던 시절, 12시가 되면 사이렌으로 정오를 알려주던 것이다. 오포대 옆에는 물이 콸콸 나오는 식수 펌프도 있다. 언제 저런 시절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열차 객차를 활용해 만들어 놓은 전시 공간도 흥미롭다.

임피역은 언제 가도 호젓하다. 건물의 파스텔톤 옥빛이 들판의 색깔과 참 잘 어울린다. 드러내지 않고 늘 담백하게 서있는 군산선 임피역, 어찌 보면 민병헌의 흑백사진 같기도 하고, 가을에 가면 더 좋은 곳이다

, 여객 운송이 완전히 중단된 20085월 이후 군산출신 소설가 채만식의 대표작인 탁류레드메이드 인생등을 모티브로 한 조형물을 설치하고 객차를 활용한 내부 전시관도 마련하는 등 군산의 새로운 관광 콘텐츠로 외래 관광객들로부터 입소문을 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역광장에 세워진 거꾸로 가는 시계탑인 시실리(時失里, 시간을 잃어버린 마을)’는 근대문화유산의 보고인 군산의 정체성을 재치있게 표현한 조형물로 시간여행의 도시 군산의 이미지와도 통일성을 갖추고 있어 보는 이들의 흥미를 유발한다.

이윽고 역전마을 안으로 접어들면 방앗간 시설물이 보이고, 조금 더 들어가면 신생이용원이라는 1970년대 간판을 만난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속으로 접어든 것 같은 느낌. 이 동네가 가장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던 1940년대에서 시간이 멈춰선 듯하다. 임피역 구내는 탁 트인 전망과 3칸짜리 통근열차의 왕래로 인해 제법 유명세를 얻었지만, 언제 가더라도 만날 수 있는 사람 수는 5명을 넘지 않는다. 4월이면 커다란 벚꽃이, 10월이면 노랗게 자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명물이 된다. 아름다운 경치는 어느 간이역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지만, 임피역이 지니고 있는 꾸밈없는 아름다움은 쉽게 접할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200611월까지 근무했던 임피역의 마지막 역무원양선재씨의 말을 빌리자면 밤이면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단다. 두 그루 은행나무가 밤새 속삭이는 사랑이야기 때문이다.

경암철길 마을도 멀지 않다. 협궤 철도가 놓인 철로변 풍경이 발길을 잡아끄는 마을이다. 철길이 놓인 건 1944년께. 한 용지 제조업체가 원료 등을 실어 나르기 위해 조성했다. 철길 길이는 2.5정도. 최근까지도 실제 열차가 철길에서 채 1m도 떨어지지 않은 판잣집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곤 했다. 열차는 20087월 운행이 중단됐지만, 낡은 판잣집 사이로 난 철길은 여전하다. 군산 외곽의 임피역도 둘러봐야 한다.

작가는 "방치돼 폐허가 되거나 철거된 간이역들이 기억에서 사라지는 게 안타까워 작품들을 기증하게 됐다"면서 "앞으로 간이역은 물론 시골 시외버스터미널, 방앗간, 창고 등을 소재로 잊혀짐과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작품들을 촬영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사진을 통해 낡은 세월 물들이며 몸담고 굴렁쇠에 내 마음도 얹어 세월의 모퉁이를 돌아본다. 삶의 간이역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철길 평행선으로 끝없이 이어진 간이역은 기억의 저편에 있는 기다림과 아쉬움의 공간이요, 또한 만남과 이별이 그려지는 설레임과 외로움의 공간이다. ‘사람들에게 잊혀진 이야기는 산이 되고, 우리들에게 버려진 추억들은 나무 되어라는 노랫말처럼 간이역은 대표적인 추억의 공간이지만 무정하게도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수십 년 세월만 녹슨 철로에 켜켜이 쌓여 있다. KTX의 등장으로 대부분의 철로가 고속전철로 바뀌고, 그에 따른 도시로의 인구 집중 때문인지 시골 간이역의 역할이 줄어들며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간이역은 이용객이 적고 효율성이 낮아 역장을 배치하는 대신 간단한 설비만을 설치한 기차역을 뜻한다. 크고 넓기만 할 줄 알았던 세상, 그러나 단 한번의 망설임과 멈춤도 없는 순간순간들을 빠르게 달려왔지만, 누구도 그리운 세상을 만났다는 사람은 없다. 우리에게 진정 돌아갈 곳이 있나?

작가는 1981년 한국사진작가협회 공모전 입상을 시작으로 40여년 동안 사진가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2001년부터 한국소리문화전당 전속사진작가로 활동해 왔으며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해왔다. 작가는백두에서 한라까지남북공동사진전에 출품한 것을 포함, ‘결빙의 세계사진집 발간과 함께 전주시예술상(사진부문)과 제37회 전라북도사진대전 대상, 25회 전북예총하림예술상을 수상했으며, ‘천년 전주 기네스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1년 전주세계소리축제 기록 사진집 제작위원, 2002 월드컵 기록 사진집 제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한국사진작가협회 정회원, 전라북도사진대전 초대작가, 천주교 천주교 가톨릭 사진작가회 회원, 유백영 법무사사무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이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