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 그림을 통해 얼굴과 몸을 통해 건강을 알아보니]'‘채용신의 인물화에 건강이 다 보이네’ 머리카락은 신장 건강과 관계되며 또한 심장에 속한다
고종 어진화가 채용신은 구한말의 뼈아픈 시대를 온몸으로 고뇌했던 인물화의 대가였다. 또한 그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는 것은 전통적인 초상화와는 많이 다른 그의 표현방식 때문이다. 물론 털 한자락이라도 다르면 같이 아니한 것이며, 사람의 모습 뿐 아니라 정신까지 표현해낸다는 전신사조의 정신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는 서양화적 요소가 도입되어있으며 당시 처음 들어와 유행하던 사진의 효과를 연구하여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그를 한국 전통 초상화의 절정이자 마지막이라고 평할 수 있다.
영조는 어진 제작에도 매우 적극적인 왕이었다. 재위 기간 중 여섯 차례에 걸쳐 모두 12본의 어진이 제작된 것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아쉽게도 왕위에 오르기 전의 모습을 그린 '연잉군 초상(보물 제1491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과 여기에 소개하는 51세 때의 '영조 어진(보물 제932호, 국립고궁박물관)' 두 점만이 전해진다.
51세의 모습을 그린 '영조 어진'속 영조는 검은색 익선관을 쓰고, 붉은색의 곤룡포를 입은 모습으로 왼쪽을 바라보며 앉아있다. 이 어진은 반신상으로 제작되어 전신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매우 아쉬운 작품이다. 고종 임금 재위 중인 광무 4년(1900년) 10월 13일 화재가 발생하여 경운궁 선원전 제3실에 봉안되었던 영조 어진과 제7실에 보관하고 있던 태조·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효명세자)의 어진이 모두 소실되자 이를 대대적으로 모사하게 되었는데, 51세 '영조 어진' 역시 이때 다시 그려졌다.
'영조 어진'은 채용신(蔡龍臣, 1850~1941년)과 조석진(趙錫晉, 1853~1920년) 등이 범본을 보고 이모(移摸)했다. 채용신은 실력 있는 사람들을 외부에서 추천받아 어진을 그렸던 전통에 따라 주관 화사로 조석진과 함께 선발되어 '영조 어진'의 제작에 참여했다. '영조 어진'의 범본이 된 어진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육상궁(毓祥宮) 내 영조가 제사를 준비하던 집인 냉천정(冷泉亭)에 봉안했던 초상화이다. 범본으로 삼은 어진은 영조 20년(1744)에 당시의 도화서 화원이었던 장경주(張敬周, 1710~?)가 주관화사로, 김두량(金斗樑, 1696~1763)이 동참화사가 되어 그린 것이다.이 어진은 영조가 생모를 곁에서 모신다는 상징적 의미에서 걸어 둔 초상화였고, 진전에 봉안하던 용도가 아니었으므로, 전신상이 아닌 약식의 반신상으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사된 어진 속 영조의 얼굴빛은 붉은 기운이 감도는 도화색으로 채색되었고, 위로 치켜 올라간 눈매의 윤곽은 진한 갈색으로 그렸다. 또 날카로운 콧날과 콧방울도 입체적으로 묘사됐다. 동의보감에는 코막힘을 폐의 병이라고 했다. 폐에 열이 쌓이면 그 열이 코로 올라가 코막힘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코막힘은 찬 기운인 풍한에 접촉이 되어도 발생한다. 이것은 찬 공기에 노출되면 하비갑개의 점막이 일시적으로 붓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선현들은 이를 구별하는 안목이 있었다. 이목구비보다 더 뛰어나게 표현된 것이 수염인데, 해당 부위에 먼저 얼굴색을 칠한 뒤, 그 위에 한 올 한 올 정성을 다해 흰색으로 수염을 그렸다. 예리한 눈매와 높은 콧등이 왕자이던 시절에 그려진 '연잉군 초상'속 영조의 모습과 닮아 있다. 옷자락을 그릴 때 외곽선을 그리지 않고 면으로만 채색하여 다시 그려진 19세기말의 유행 했던 초상화 양식을 따랐다. 일례로 곤룡포 위에 착용하던 대(帶)의 위치가 앞가슴 보(補)쪽으로 올라가게 그린 것은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화면 우측에 “영조대왕어진 광무사년경자 이모(英祖大王御眞 光武四年更子 移摸)”라는 표제가 있는데, 이 표제는 고종 황제가 직접 쓴 것이다.
100여장의 옛 그림과 사진으로 조상의 문화와 철학을 소개하는 '얼굴과 몸을 살펴 건강을 안다(지은이 윤소정, 발간 퍼이퍼 로드)'는 건강의 징후를 찾을 수도 있고, 한약재의 모습이나 풍속의 한 장면을 소개한다. 한의학은 의학이면서 철학이다. 해부학적 구조보다 실제 우리 몸 안에서의 기능을 더 중시하는 측면이 있다. 동양화도 마찬가지다. 겉모습의 치밀한 묘사만이 아니라, 내면을 포함한 대상 그 자체를 온전히 그림으로 옮겨 놓으려 한다. 옛 그림과 한의학이 만나는 지점이다.
채용신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역시‘최익현 초상화(보물 제151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다. 생의 후반기에 전라도 지역에 머물던 채용신은 면암 최익현(1833~1906) 등 전통 수호를 주장하던 위정척사계열의 항일운동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초상화를 그려준다. 보물 1510호로 지정된 채용신의 ‘최익현 초상’은 74세의 노인이 됐지만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이 생생한 우국지사의 풍모를 보여준다. 갸름하지만 유약하지 않고 오히려 날카로우며 허술한 듯하지만 강인함이 느껴진다. 선비임에도 털모자를 쓴 까닭은 그가 추위를 뚫고 다니며 의병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딱 그림처럼 고집스러웠던 최익현은 일제에 의해 쓰시마섬에 유배됐고 적(敵)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버티다 굶어 죽었다.
오른쪽 상부에 면암최선생 칠십사세상 모관본(勉菴崔先生 七十四歲像 毛冠本)을사맹춘상한 정산군수시 채석지도사(乙巳孟春上澣 定山郡守時 蔡石芝圖寫)라고 써 있다. 1905년에 채용신이 그린 최익현의 74세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익현은 머리에 겨울철에 사냥꾼이 주로 사용하는 쓰개인 가죽 감태를 쓰고 심의를 착용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약간 오른쪽을 향하고 있는 정면 반신상이다. 얼굴은 갈색선을 수없이 그어 요철과 명암을 묘사하고 있는데 얼굴의 고저(高低)에 따라 밝기를 구분하여 입체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 위에 갈색 선으로 대담하게 주름을 그었다. 가죽 감태의 하얀 털 표현도 거친 질감을 전해준다. 얼굴과 의복 등 전체적으로 섬세하기 보다는 건조하고 야성적인 분위기를 준다. 옷 주름의 접힌 부분은 남기고 흰색을 전채(前彩)했다. 인물의 배경에는 담묵을 칠해 공간감을 형성했다.
모관의 털은 물론 코와 턱의 수염과 눈썹에 대한 묘사가 역시 그에 못지 않게 탁월하다. 동의보감에는 머리털(모발)에 관한 챕터가 있다. 털, 특히 털 중에서 가장 풍성하달 수 있는 머리털은 단순히 저 혼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오장의 건강 가운데 신장 건강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건강의 중요 지표라는 의미다. 젊은 여성들의 윤기나고 풍성한 모발과 나이 든 사람들의 푸석하고 숱 듬성한 모발을 비교해 보면 오장육부와 기혈, 경락 등의 작용이 모발에 미치는 영향을 눈으로 볼 수 있다. 동의보감에서는 머리카락을 ‘혈의 잉여’로 분류한다. 몸 내부의 혈의 상태가 머리카락에 나타난다는 의미다. 혈이 상하면 머리카락이 상하고 윤기가 없고 푸석할 수 밖에. 나이 들어서 혈이 졸아들어도 머리카락은 초라해진다. 머리카락은 신장 건강과 관계되며 또한 심장에 속한다.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자라는 모양이 심장이 불끈불끈 뛰는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달면서도 쓴맛이 있는 연꽃잎은 혈액순환을 좋게 하고 어혈을 풀어주는 데 신효하다. 타박상으로 인한 울혈을 치료하고, 상처에 찧어 붙이면 지혈 효과가 크다. 흰 연꽃 한장을 종기가 난데 찧어 붙이면 놀랄 만큼 빨리 낫는다. 연꽃의 노란 수술 말린 것은 치질과 치루를 치료하는데 쓰이고 당뇨병으로 인한 심한 갈증을 멎게 하고 혈당치를 내리는 효과가 있다. 연꽃은 머리결을 좋게하고 검게한다고 한다.
최북의 '애련도(愛蓮圖), 지본담채, 55 × 32.5 cm, 개인 소장)'에 화제로 쓰인 蓮之愛同予者何人 즉 ‘나만큼 연꽃을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라는 말은 중국 송(宋)나라 때의 유학자 주돈이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에 있는 글귀다. 주돈이는 이 글에서 연꽃을 꽃 중의 군자[花之君子]라며, 자신의 연꽃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자신이 군자로서의 길을 가고 있다고 드러냈다. 최북도 군자처럼 살며 군자로 대우받으며 살고 싶었을 것은 아닐까./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