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스토리
다시 보는 전주 관성묘, 죽어서 신이 된 관우, 전주에 온 까닭
이종근의 행복산책
2022. 4. 3. 22:27
죽어서 신이 된 관우(關羽), 전주에 온 까닭
/강석훈(국립무형유산원 학예연구사)
한국 사람 남녀노소 통틀어 『삼국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소설 『삼국지연의』는 한국인의 스테디셀러 중 하나로 손꼽힌다. 약 1800년 전, 후한(後漢)이 멸망하고 위, 촉, 오 세 나라로 쪼개져 다투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이야기는 거대한 문화 콘텐츠로 자리하여 영화, 드라마뿐만 아니라 게임산업까지 깊숙이 파고들어 이제는 스마트폰에서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삼국지 영웅호걸 중에서도 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명장 관우(?~219년)이다. 관우는 유비, 장비와 도원결의를 맺고 평생 유비를 보좌하며 촉나라 장수로 천하에 맹위를 떨쳤는데, 그가 전장에서 남긴 숱한 명언들과 이야기는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이다.
관우는 역사를 거듭하며 불세출의 영웅으로 추앙되는데, 1102년 송나라 황제 휘종은 그를 충혜공(忠惠公)으로 추봉하여 왕의 작위를 내렸다. 1594년 명나라 황제 신종은 관우를 황제에 봉하고 그의 사당을 영렬묘(英烈廟)라 이름 지었다. 관우 숭배는 청나라 때도 이어져 1703년 황제 성조는 관우의 부친과 조부에게까지 왕의 작위를 내렸다. 관우는 이러한 중국인들의 열렬한 사랑에 힘입어 공자와 함께 문무이성(文武二聖)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관우 숭배 사상이 전파된 것은 임진왜란(1592~1598) 때이다. 명나라 장군 진인(陳寅)이 서울 남묘에 관우의 조각상을 모시기 시작한 이후, 조선 조정에서도 관우 신앙을 받아들여 국가의 공식적 제의로 받아들였다. 선조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왕들은 전국 각지에 관우 사당을 세우고 친히 의관을 정제하여 제례에 임했다. 이는 관우라는 강력한 인물신을 내세워 왕의 입지를 다지는 한편, 지역에서는 유력 관리들과 무관들이 권력을 점하고자 했던 정치적 의도가 맞물린 결과였다.
전주 관성묘는 완산구 남고산 남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1895년 전라도 관찰사 김성근(金聲根)과 남고산성 무신 이신문(李信文)이 제안하여 지역 유지들의 지원을 받아 건립하였다. 입구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적힌 비석이 있다. 신분 여하 막론하고 입구 앞에서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대문 좌우에는 관우가 생전 타고 다닌 명마 적토마와 이를 관리하는 무관이 자리하고 있다.
관성묘 정전에는 관우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위령현혁(威靈顯赫)’과 ‘문무성신(文武聖神)’이라 쓴 편액이 걸려있다. 흥미로운 점은 편액을 지어 올린 사람들이 모두 화교 출신이라는 것이다. 전자의 편액은 두 개인데 하나는 1921년, 다른 하나는 1965년에 올렸고, 후자의 편액은 1912년에 기증한 것이다.
모두 전주 일대에서 활약했던 화교 출신의 상인, 교육자들이었다, 지금도 화교들이 찾아와 제를 올리는 등 청나라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관성묘는 화교들의 성지이자 보금자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정전 안에는 관우의 소상을 좌우로 네 인물이 포진해 있다.
관우의 장남 관평(關平), 최측근 장수 주창(周倉), 조루(趙累), 왕보(王甫)이다. 이들은 오나라가 형주를 침공했을 때 관우를 끝까지 보좌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자들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인물 제갈량이 있다. 제갈량은 유비의 익주 공략 때 관우와 함께 형주에 남아 정무를 총괄하며 수비를 맡았던 파트너이기도 하다. 즉, 전주 관성묘는 촉나라가 가장 번창했던 때, 그리고 관우의 위세가 제일 높았던 때의 주변 인적 구성을 재현한 것이다.
관우는 전쟁신, 호국신, 재물신, 치병신, 기복신 등 여러 복합적인 신격을 두루 갖고 있다.
특히 민간신앙과 결부되면서 재물을 관장하고 복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부각 되어 그의 생일인 5월 13일에 더하여 경칩, 상강, 동지 등 주요 절기와 백중, 초파일, 칠석 같은 날에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 관우를 기념하고 복을 기원하는 풍속이 전해지고 있다.
올해로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았다. 국가 간 교류의 물꼬는 양국의 문화 접점에서부터 트인다. 삼국지열전의 한국판 전주 관성묘는 문화재자료 그 이상의 잠재력과 가치를 지닌 외교자산이다./새전북신문 2022년 4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