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미록과 음식
쇄미록과 음식
어릴 적 시골에서 큰 밥그릇에 가득 고봉으로 밥을 쌓아서 먹던 어른들의 밥그릇이 기억난다.
조선시대 3대 사서인 '쇄미록(瑣尾錄)'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한양을 점령한 왜군들의 군량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를 첩자가 알아내 온 바, 당시 조선군의 식사량으로 계산해보니 약 한달 분량이었다. 한 달 뒤면 왜군들의 식량이 떨어져 물러 갈 것이라 생각하고, 성 앞에 진을 치고 기다렸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한달이 지나도 왜군들이 후퇴하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왜군들의 밥그릇은 조선군의 1/3 크기였고, 그래서 식량 아끼려고 밥그릇이 아닌 김치 종지에 먹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군이 식사량을 줄인 것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 백성의 밥 한 그릇은 약 690g으로 지금보다 4~5배가 큰 엄청난 대식가였으며 1940년대까지도 비슷한 크기였다, 고려시대는 1040g, 고구려 시대는 1300g의 밥그릇을 사용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학자인 오희문(1539∼1613)은 임진왜란 시기에 쓴 일기인 '쇄미록'에 이같은 기록을 남겼다. 그는 장을 담그기도 했는데 오늘날 메주에 해당하는 말장과 소금의 비율을 상세히 적어놓았다.
'여종 강비의 남편 한복이 그물을 가지고 연못에 가서 고기를 잡아 붕어 17마리를 얻었기에 저녁밥 지을 쌀을 주고 바꿨다. 다음 날에 다시 잡으면 식혜를 담갔다가 한식 제사에 쓰련다'
임진왜란을 기록한 3대 저서로《난중일기》 《징비록》과 함께 오희문의 《쇄미록》을 꼽는다. 쇄미록(瑣尾錄)은 '보잘것없이 떠도는 자의 기록'이란 뜻이다.
오희문은 임진왜란 당시 토목 일을 맡은 관리였는데 지방에 사는 외거노비들에게 공물을 받을 목적으로 1591년 11월 27일 한양을 떠났다가 전라도 장수에서 임진왜란을 맞은 후 1601년 한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9년 3개월 동안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지역을 옮겨 다니며 일기를 썼다.
'쇄미록(瑣尾錄)'. 오희문이 자기 일기에 붙인 제목으로, '보잘 것 없이 떠도는 자의 기록'이란 뜻이다.
‘쇄미’의 뜻은 『시전(詩傳)』북풍(北風) 모구장(旄丘章)에 있는 “쇄혜미혜 유리지자(瑣兮尾兮 流離之子)”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피난에 대한 기록이란 의미이다. 일기의 끝에 “이제 종이도 다하고, 또 서울에 다시 돌아와 유리(流離)할 때도 아니므로 붓을 그친다.”고 서술하여, 이 글의 목적이 피난 중의 일을 기록하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임진년 이전인 신미년, 즉 1591년 11월 27일 한양을 떠나 경기도 용인에 사는 처남 서당에서 머문 이야기를 시작으로 1601년 2월까지 9년 3개월간 일기를 썼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남도로 발걸음을 옮긴 오희문은 또 다른 처남이 수령으로 있는 전라도 장수현에 갔다가 1592년 2월 충청도 영동과 황간에서 외가 친척을 만나고 다시 장수로 돌아온다. 이어 그해 3월에 다시 길을 떠나 전라도 각지를 두루 순례하고 4월 13일 장수에 도착한다.
오희문은 각종 풍문과 문서를 글로 남기는 침략하고 노모와 처자의 생사를 모르는 상황에서도 각종 문서를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소문의 전달자, 문서 작성일시와 작성자를 빼놓지 않고 기록했다.
오희문은 해주 오씨로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처남인 이빈(李贇)이 장수 현감으로 부임하자 장수에서 멀지 않은 황간의 외가를 방문하고, 또 자신 소유의 전라도 노비들에게 신공(身貢)도 걷기 위해 장수현에 들렀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울로 가지 못하고 장수에 머물면서 ‘피난 일기’를 썼다.
<쇄미록>에는 가자미 등 어류 44종, 오징어 등 연체류 4종, 게·전복 등 갑각류와 패류 6종 등 다양한 해산물이 등장한다. 16세기 조선 중기의 수산물 조리법을 짐작할 수 있는 음식명도 많이 나오는데, 사용된 조리법은 죽, 탕, 찜, 삶기, 구이, 회, 포, 젓갈, 식해, 건조, 절임 등이었다.
“이른 아침에 물고기를 두어 말을 얻었는데 모두 크기가 전일에 잡았던 것이 아니다. 그중에 빙어는 크기가 청어만 한 것이니 20마리나 된다. 회를 쳐서 먹으려 했으나 겨자가 없고 또 술이 없어서 먹지 못했으니 한스럽다. 모두 쪼개서 말리게 하고 그 나머지 큰 것을 구워 먹었다”(1597년 10월 6일) 같은 대목은 당시 생활상을 엿보게 해준다
‘임자중(任子中)이 집노루 고기를 가지고 와서 마을 사람들이 함께 요월당에 앉아 배불리 먹었다. 마침 술이 없더니 추로(秋露) 한 병을 얻어서 경흠의 서모(庶母)의 집에서 각각 석잔 씩을 마시고 헤어졌다.’(且任子中 備家獐而來 與洞人輩相與坐於邀月堂飽食 而適無酒 覓得秋露一壺 於景欽庶母家 各飮三杯而罷)
는 기록처럼,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장치로서 술을 자주 접했던 기록도 많이 나타난다.
‘또 오늘은 어머님께서 학질을 앓으실 날이어서 일찍 학질 떼는 방법 세 가지를 했다. 하나는 복숭아씨를 축문(呪文)을 외우면서 먹는 것이고, 하나는 헌 신 밑장을 불에 태워서 물에 섞어 먹는 것이요, 하나는 제비 똥을 가루로 만들어 술에 담가가지고 코 밑에 대어 냄새를 맡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모두 옛날 쓰던 방법으로서 효력이 가장 있다고 해서 하는 것이요, 또한 하기도 어렵지 않은 것이다'
1594년 2월 10일자엔 '먹을거리가 부족해 사내종들에게는 아침에는 7홉을 주고 저녁에는 죽을 쑤어 나누어 먹였다'고 나온다.
<쇄미록>에는 “조선의 일반적인 성인 남자는 1끼에 7홉이 넘는 양의 쌀을 먹는다”고 적혀 있다. 당시 7홉은 420g 정도로 현재 공깃밥의 2배다. 당시 7홉을 지금의 계량 단위로 환산하면 1,260㎖나 된다. 290㎖ 밥그릇으로 5그릇이다. 보통사람은 요즘 사람의 3배, 양이 큰 사람은 5배의 밥을 먹었다고 봐야 한다.
전쟁통인데도 쌀 일곱 홉(420g)으로 밥 한 그릇을 지어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수북하게 담은 감투밥·머슴밥·고봉밥은 날마다 꾸는 꿈이었다.
먹을거리가 눈앞에 보이면 아무리 폭식을 했다고 해도, 결국 쌀밥을 많이 먹는 데 목숨을 걸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대식의 쌀밥을 위해서 나라에서도 곡물 생산에만 집중했다.
'쇄미록'에는 “듣자니 시장에서 큰 전어 한 마리의 값이 쌀 석 되 값”에 이른다는 기록도 있다. 예로부터 맛이 으뜸이니 본전 생각 따위는 접어두고 폭풍 흡입한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