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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곡 소세양

이종근의 행복산책 2021. 7. 13. 15:00

조선 전기 익산 출신의 문신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1486~1562)과 곤암(困菴) 소세량(蘇世良,1476~1528] 형제의 지극한 효성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소세양과 소세량은 여덟 남매 중 형제이다. 소세량이 대사간(大司諫) 벼슬에 있을 때였다. 당시 아버지가 구례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병이 나자 소세량이 상소를 올려 벼슬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고자 했다. 그러자 왕이 효심에 감동해 소세량을 전라감사에 임명했다고 한다. 전라감사에 부임한 소세량이 밤낮으로 극진히 병간호를 했으나 아버지는 결국 병이 깊어져 돌아가셨다. 소세량은 상을 치르기 위하여 전라감사를 그만두고 여막을 지어 시묘살이를 했다. 힘든 시묘살이에 병을 얻은 소세량은 삼년상을 치르고 다음 해에 죽었다.
양곡 소세양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혼자 남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상소를 올리고 내려왔다. 이때 왕이 소세양에게도 전라감사를 제수했다. 나중에 소세양이 중앙 관청으로 올라갈 때는 어머니를 모시고 한양으로 갔다. 이때 왕이 자신의 수라상을 소세양의 어머니에게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왕과 소세양 사이의 의리가 두터워 소세양은 육조판서(六曹判書)를 다 거쳤다. 그러다 어머니가 너무 노쇠해지니 벼슬을 버리고 다시 익산으로 내려왔다. 이후 소세양은 왕이 영의정 벼슬을 내려도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소세양은 익산 출신으로 조선시대 전기 전라감사와 형조와 호조, 병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좌찬성에까지 올랐으며 시문에 능해 당시 연경(지금의 북경)에서도 그를 흠모하는 학자와 관료, 문인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소세양은 평소 필체와 문장이 좋기로 소문나 있었다.  문과에 급제한 후 원접사(遠接使)로서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는 역할을 하였고, 진하사(進賀使)로서 중국에 다녀온 적도 있다. 한번은 소세양이 중국 사신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얼마 뒤 소세양의 필체와 문장에 반한 중국 사신들이 다시 그를 찾아 이것저것 물어보았는데, 중국에는 신기한 물건이 많다고  은근히 놀렸다. 이에 소세양은 “조선의 금마에도 삼기(三奇)가 있는데, 빙교(氷橋), 움송(松), 삼율(三栗)이 그것이다”라고 허풍을 쳤다. 움송은 베고 나서 하룻밤을 자고 나면 원래대로 자라고, 삼율은 1년에 밤이 세 번 열리는 밤나무이며, 빙교는 얼음다리를 말한 것이다. 이에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와서 직접 둘러보자고 하자, 소세양이 기질을 발휘해 익산에 괴질이 만연하여 가면 죽는다는 말로 중국 사신들을 따돌렸다.
익산엔 소세양과 조선 시대 최고의 명기인 황진이의 연애담이 담긴 설화가 전하고 있다. 소세양과 혼담이 오간 적이 있는 노씨 집안 규수가 후일 과거에 급제한 소세양을 보고 신세를 비관하여 자결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소세양 때문에 생긴 괘인정(卦印亭)가 있다.괘인정은 ‘관인(官印)을 걸어 놓는 정자’라는 뜻을 지닌다. 소세양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익산에 머무는 동안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행정마을에 태허정(太虛亭)이라는 정자를 지었고, 태허정 아래 쪽에 퇴휴당(退休堂)을 지었다. 평소 소세양은 율시(律詩)에 뛰어나고 송설체(松雪體)의 글씨를 잘 써서 필명 또한 높았다. 이에 익산 지역 부근으로 부임해 오는 관리들은 소세양을 찾아 인사를 드리곤 하였는데, 은행나무에 관인을 걸어 두고 인사를 했다고 하여 퇴휴당을 ‘괘인정’이라 불렀다.
이같은 이름이 생긴 것은 조선 시대 문정공(文靖公)의 시호를 받은 소세양의 위상을 대변한다. 또, 괘인정은 ‘행정마을’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유추하게 하는 매개가 된다. ‘행정(杏亭)’은 소세양의 퇴휴당이 있던 곳에 큰 은행나무가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진다.
머지않아 조선시대 익산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히는 양곡 소세양의 문집이 아직까지 한글 번역이 된다.이 책은 황진이와의 애틋한 일화와 연시(戀詩) 등이 전해져 문학적으로도 가치 있는 인물로 꼽히고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2021년도 사업대상서목엔 양곡집1로 권1~4가 번역된다. 자못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