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방장산과 양고살재
고창군이 석정온천 일원에서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양고살재-석정온천 등산로’를 개통했다. 산책로는 진입로 구간에 흙콘크리트 100m, 목재데크길 65m, 경사 구간 보행매트 100m 등으로 만들어졌다.
방장산(方丈山)은 고창군의 진산으로 정읍 고부의 두승산, 부안의 변산과 더불어 전북의 3신산이라고도 하며, 지리산, 무등산과 더불어 호남의 3신산이라고 불린다.
내장산의 서쪽 줄기를 따라 뻗은 능선 가운데 가장 높이 솟은 봉우리로, 양고살재에서 벽오봉, 고창고개, 봉수대, 써래봉을 거쳐 갈재로 이어져 있다. 백제 때부터 ‘방등산’ 또는 ‘반등산’이라 불리다가 조선 후기인 인조 때 청나라에 멸망한 명나라의 선비들이 중국의 3신산인 방장산과 비슷하다고 해서 ‘방장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 편에는 방등산(方等山)이라 기록되어 있다. ‘방등’이란 불가의 용어로 ‘방정하고 평등’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백제가요인 「방등산가(方等山歌)」는 바로 이 산을 무대로 해서 지어진 노래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반등산가」ㆍ「반등산곡」이라 기록되어 있다. 「방등산가」는 신라 말 도적이 반등산에 근거를 두고 양가집 자녀들을 많이 잡아갔다.
그 중 장일현(長日縣)에 사는 여자가 남편이 구하러 오지 않은 것을 원망하며 부른 노래라고 한다.
이 노랫말은 아쉽게도 현재는 전하지 않고 있다. 당초 이 산을 방등산이라고 불렀다가 방장산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은 산이 넓고 커서 백성을 감싸 준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명나라 이여송이 방장산의 수려한 산세를 보고 큰 인물이 날 것을 경계해 쇠말뚝 5개를 박아 산의 정기를 차단했다고 하며, 일제강점기에도 일제가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양고살재는 고창군 고창읍 석정리에서 전남 장성군 북이면 죽청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고창 출신 박의(朴義)장군이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 누루하치 장군의 사위인 적장 양고리(陽古利)를 사살한 것을 기념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박장군은 1599년 고수면 초내리 산양동에서 관찰사 양오공의 종손으로 태어났다. 말을 잘 타고 총을 잘 쏘아 박포수로 불릴 정도였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이때 박의가 수원 광교산전투에 참여해 적장 양고리를 사살했다. 다른 명칭 유래를 살펴보면 큰 재와 작은 재 등 두 개가 있다고 해서 양고령이라 불렸으며, 양고령 발음이 변화함으로 인해 ‘양고살재’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김준룡은 1636년 병자호란 발발하자 1월 4일 2000명 남짓한 병력을 이끌고 광교산에 진을 쳤다. 이들은 다음날 청군 5000명을 격퇴한 데 이어 이튿날에도 화포를 동원한 적의 공격을 받았다. 김준룡은 유격부대를 투입했는데 이 전투에서 적장 양고리를 사살했다. 미수 허목은 이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공이 칼을 들고 화살과 돌이 쏟아지는 가운데 필사의 의지를 보이자, 병사들이 모두 죽기로 작정하고 싸웠다.…어떤 오랑캐가 산꼭대기에 큰 깃발을 세운 뒤 갑옷 차림으로 말에 올라 군사를 지휘하자…공이 그 사람을 가리키며 ‘저 자를 죽이지 않으면 적병이 물러가지 않을 것이다’ 하고 외치며 전투를 독려하니 군사를 지휘하는 자와 그 좌우 몇 장수가 일시에 탄환을 맞았다.…죽은 장수는 선한(先汗)의 사위 백양고라(白羊高羅)였다’
백양고라가 곧 양고리다. ‘선한’이란 청태조 누르하치를 말한다.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의 귀와 코를 씹어먹었다는 인물이다. 이때 나이가 14세였다. 누르하치의 사위가 되었으니, 청태종 홍타이지의 매부다. 누르하치가 ‘전장에서는 몸을 좀 사리라’고 했을 만큼 겁이 없었다는 그는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박의는 1624년 무과에 급제했으니 졸병이 아니다. 그럼에도 벼슬은 평안도 직동의 종9품 권관(權管)에 머물렀다. 승진은커녕 변방으로 좌천된 꼴이다.
유득공은 ‘고려의 김윤후는 몽골의 살례탑을 활로 쏴 죽여 대장군에 제수됐다. 그런데 박의는 직동 만호에 그쳤으니 사람들은 애통해한다’고 ‘영재집’에 적었다.
만호는 권관보다 한 단계 높은 벼슬로, 사람들은 때문에 더욱 애통해하며 그의 뛰어난 로가 김윤후에 버금갈 것이라고 했다. 이경민의 ‘희조일사’를 보니 이와 비슷한 기록이 나온다.
이번 데크길은 지면에서 약 0.5~1m를 올려 설치, 대나무 사이를 걸어가면서 산림욕으로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 조총 탄환을 양고리에게 명중시킨 박의의 이름이 역사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다./이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