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원과 참점(站店), 그리고 전주 사대병암
유형원은 상공업에선 화폐의 주조·유통에 국가가 적극 개입하는 관리통화제를 실시하고, 전국적으로 참점(站店)과 같은 상설점포 체계를 구축하여 교환·유통 경제가 활성화되도록 구상했다.
율현점(栗峴店)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율현동 일대에 있었던 조선시대 공무여행자(公務旅行者)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시설이다. 조선시대 한양 도성을 나와 사평나루·청담나루·송파나루를 건너 광주로와 용인로로 이어지는 대로 길목에 위치한 원점으로써, 중요 교통로를 운영하는데 휴게소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에는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사신은 물론이고, 상인 등 일반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공공 여관인 원(院)이 운영됐다. 원은 역제(驛制)와 더불어 역원제도로 운영됐다. 조선 후기에는 역원제의 변형 모습인 참점(站店)으로 발달하여 신원점(新院店)과 율현점(栗峴店)이 운영됐다. 여기서 참점은 원점(院店)과 같은 것으로 원과 주점이 결합된 형태로 행인에 대한 숙식·음료 제공과 물자유통 기능이 이루어져 상공업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삼국시대 우역(郵驛)제도가 운영된 이래 고려 시대에 역참이 전국적으로 조직 운영되었으며 왕권 강화에 기여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도성 내의 도로 정비 뿐만 아니라 전국의 간선·지선도로를 망라하여 대·중·소로의 등급을 정하고 도로교통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관할구역을 정해 역원을 설치하였다. 이중 원은 조선시대에 전국적으로 1,310개소가 설치 운영됐다.
전주천 숨길은 바람 쐬러가는 길로 이어진다. 전주천을 끼고 계속된다. 나비가 길바닥에 앉아 바람에 흔들립니다. 나비춤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사대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인근에 개 2마리가 지키고 있는 밀양박씨 사당(守遠齋, 수원재)을 보는데, 자전거 전용 다리 위를 달리는 전주 시민들의 모습이 보인다.
전주 ‘사대(四大)’마을은 이곳에 장군대좌(將軍大座) 금반옥배(金盤玉盃) 복호(伏虎) 금구몰니(金龜沒泥)의 4대 명당이 있다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이 마을 할아버지는 “4가지가 크다 하여 사대마을이라고 했다”면서 “山大,산이 크고, 石大, 돌이 크고(중바위), 風大(좁은목 바람) 마지막으로 水大(전주천)”라고 설명한다.
마을에서 승암산 쪽으로 100미터쯤 가면 초변골이 있는데, 여기에 육탈이 될때까지 시신을 묻어 놓았었다고 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보면 사대원(四大院)이라는 역원이 전주관아 남쪽 5리에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1871년에 편찬된 ‘8도 도지(호남읍지, 전주)’를 살펴본다.
전주는 지금의 전주시 삼례읍, 봉동읍과 완주군 용진면·소양면·상관면·구이면·이서면, 익산시 익산 시내·오산면·왕궁면, 김제군 금산면 일부, 충남 논산시 양촌면 일부를 포함하는 호남의 대도회(大都會)였다.
‘역원조’에는 삼례역(參禮驛), 앵곡역(鶯谷驛), 반석역(半石驛), 금광원(金光院), 숙점원(宿店院), 안덕원(安德院), 사대원(四大院), 허고원(虛高院), 장신원(長信院), 상관원(上館院), 추천원(楸川院), 월당원(月塘院), 피계원(皮界院), 보산원(補山院), 대초원(大初院), 광제원(廣濟院), 탄현원(炭峴院), 모로원(毛老院), 동복원(東福院), 모지원(毛知院), 내현원(奈峴院), 신원(新院), 삼례원(參禮院) 등의 위치, 이칭 등을 기록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 33권 ‘전주부’를 보면 남복원(南福院), 모질지원(毛叱知院) 등도 보인다.
조선시대 여행의 편의를 제공하던 시설(지금의 여관)로서 원(院)제도가 있었다. 원은 반관, 반민성격으로 고려시대 부터 있어 온것이지만 그것이 하나의 교통기관으로 제도화 된 것은 조선왕조부터였다. 이와 같은 원은 기록으로만 전해올 뿐 흔적을 찾아볼 수 없어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당시 원우(院宇)를 짓고 서울 지역은 5부, 지방은 수령이 부근의 주민 가운데 승려·향리·관리로써 대로는 5호(戶), 중로는 3호, 소로는 2호를 원주(院主)로 임명했다. 이들에게는 잡역을 면제해주는 대신 원의 운영 책임을 맡겼다. 또 원의 운영경비로 원위전(院位田)을 주었으며 한성부와 관찰사가 이를 감독하였다.
원은 교통사정이 원활하지 못한 당시에 여행자를 도둑이나 맹수로부터 보호하였다. 또 지방에서 기로연(耆老宴)를 베풀기도 하였고, 진제장(賑濟場)을 두어 굶고 병든 사람을 구제하는 역할도 하였다. 또한 공무여행자 뿐만 아니라 일반 행인에게도 휴식과 숙박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우의 관리가 철저하지 못하고 폐지되기가 일수여서 공무여행자의 숙식을 관·역이나 민간업자에게 일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임진왜란 후 파발제도의 실시와 함께 파발의 참(站)마다 참점이 설치됐으며, 그 다른 이름이 원점이다. 참점은 후에 주점·주막으로 부르는 거리 집으로 발전했다. 조선시대에 한성에서 지방으로 연결되는 전국 도로망 가운데 용인로나 광주로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사평나루·청담나루·삼전도·송파나루 등을 건너야 했다. 이에 사평나루에 원이 설치되면서 사평원이 등장되었고, 여기서 양재역을 지나 조선시대 광주부 서쪽 35리 지점 언주면의 신원점과 연결되어 남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는 판교와 용인 지역으로 나가는 길목이 되었다. 그리고 율현점은 대왕면에 있었는데, 광주부에서 서남쪽으로 25리이고, 남쪽으로 판교까지 20리에 있다. 동남쪽으로 15리 거리에 추령(秋嶺)으로 이어져 용인에 이르는 통로가 되었다. 다시 북쪽으로 15리에 있는 삼전도를 건너 한성에 이른다.
‘참점(站店)〔속칭 주막(酒幕)〕이 있는 곳에는 참점경참점경(站店頃)을 두어서 세와 병역을 면제해 주고 단지 호전(戶錢)만을 내게 할 것이다.〔전야경의 등급으로 표준한 것이 아니라 매 1경에 20호로 정하여 1호마다 풍년과 흉년을 불문하고 돈 40문(文)을 세로서 내게 할 것이다. 만일 경 내에 20호가 못되어 빈집과 버린 집터가 있으면 그것에 대한 세를 면제하여 주고 만일 그것을 경작하는 자가 있으면 그에게 그것에 해당한 돈을 받을 것이다.〉 또 참점은 30리마다 하나씩 둘 것이나 15리에 하나씩 둘 수도 있다.〕 이 참점경(站店頃) 내에는 도로도 포함되는바 길의 너비는 18보로 하고 양옆의 도랑은 각각 2보 너비로 하며 도랑 밖에다 점사(店舍)를 짓고 또 그 외에 거처할 집을 지을 것이다. 대체로 1호의 기지(基地)는 점사와 사는 집을 합하여 남북이 10보, 동서가 37보로 하고 점사의 너비는 2간(間), 길이는 4간으로 한다. 두 점사와의 사이에는 공지 5보를 두어 거름을 쌓는 장소로 쓰게 하며 또 화재를 방지케 할 것이다. 그리고 길을 향한 쪽으로는 담장을 쌓아서 길을 가리게 하고 점사와 사는 집 사이에도 공지 5보를 두게 할 것이다. 거처하는 집의 기지는 남북이 10보, 동서가 24보로 할 것이다. 도로와 주택은 될수록 정연하게 할 것이며 시가는 길가에다 설치할 것이다. 그러나 지형이 불편한 곳이면 그 지형을 따라서 하거나 혹은 한쪽에는 길을 내고 한쪽에는 점사와 사는 집을 두게 하여 너비를 줄이고 길이를 늘려서 경을 만들 것이나 그래도 경이 차지 못하면 여전을 두는 예와 같이 하며 시가의 배치에 있어서도 형편을 보아서 편리하게 할 것이다. 모든 참점의 주변은 담으로 둘러쌓고 남쪽과 북쪽에다 문을 내어 아침 저녁으로 열고 닫게 할 것이다.(반계수록 1권)’
유형원은 과거제와 정치제도 개혁 등 많은 개혁안을 냈고, 그것들이 저서 ‘반계수록(磻溪隧錄)’에 집대성되어 있다. 이러한 반계의 사상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기본정신에서 비롯됐고, 훗날 실학자들은 물론 정약용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반계가 자신의 전 생애를, 생전에는 발간하지도 못할 <반계수록>을 저술하는 데 바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효종의 밀지(密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저술하기 위해 전라도 부안으로 내려간 까닭이 1653년(효종 4)이니 충분히 일리가 있는 설이기도 하다.
소현세자의 동생이 효종이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으로 청나라 볼모살이에서 돌아온 지 채 석 달도 안 되어 독살 당한 비운의 세자이다. 유형원은 부안으로 서책 1만여 권과 함께 내려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불후의 명작이자 아직까지 그 어느 나라에서도 이루어보지 못했던 평등사상의 기조 정책을 담은 역작 <반계수록>을 저술했다. 물론 효종은 <반계수록>이 완성되기도 전에 승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