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스토리
순창팔경가를 아십니까
이종근의 행복산책
2021. 3. 14. 22:23
왕족 출신 시조 작가 이세보(李世輔, 1832~1895)가 선정한 순창의 팔경이 있다.
'순창팔경가'는 여러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를 지니는 작품이다. 지역적으로는 순창 일원의 팔경을 담아낸 유일한 작품이라는 의의가 있다. 소상팔경의 전례를 따라 각 지역의 승경 여덟 가지를 꼽아서 엮어 내었던 문화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있어 왔거니와, 그러한 경향이 이세보에 의해 순창 지역에까지 확산됐다. 아울러 종래에는 한시의 고유 영역이었던 팔경시의 전통을 국문시가에 접목하였다는 의미도 각별하다. 여덟 개의 장으로 구성된 일부 경기체가 작품들에서 팔경시가 국문시가화되는 경향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이세보의 경우에는 팔경시에 대응하는 팔경시조의 영역을 새롭게 창안해 내었던 것이다.
이세보는 방위별로 군집을 지으면서 순창의 팔경을 선정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관아가 위치한 순창의 북쪽, 경천 건너의 남쪽, 그리고 적성강이 흐르는 동쪽을 차례로 훑어가며 두 개씩의 경치를 연관 지음으로써 지점과 지점 사이의 상관성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사항을 고려한다면, 8수에도 역시 두 수씩 짝을 지어 연관성을 드러내는 방식이 적용되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제1, 2수에는 순창의 진산인 금산과 그 주변의 경치를 담음으로써 작품의 시발점을 삼았다. 두 수의 상관성은 작품의 형식 및 내용상의 특징으로도 현시되고 있다. 초장은 초장끼리, 중장은 중장끼리 표현이나 통사가 유사하게 유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두 수에서는 모두 경물로부터 촉발된 흥취가 취락으로 이어진다는 공통점도 나타난다. 제3, 4수를 묶어 주는 기반은 ‘대’와 ‘연’이라는 소재이다. 순창에서 손꼽히는 두 가지 식물의 정취가 두 수에 연속적으로 나타난다. 또 한편으로 여타의 수들과 달리 유독 제3, 4수에서는 아쉬움 내지 상실의 정서가 배어 나온다는 점에서도 두 수는 연관성을 지닌다. 제5, 6수에는 화락한 정서가 다시 나타나는데, 그 같은 풍류를 가능케 하는 공통된 계기는 달과 취흥이라는 두 가지 요소이다. 순창에서 달밤을 즐기기에 가장 이상적인 공간을 두 군데 선정하여 제5, 6수를 지어 내었다고 파악된다. 또한 그 두 곳이 모두 아미산이라는 공간적 범위로 수렴되고 있기도 하다. 제7, 8수는 적성산과 적성강이라는 순창군 동편의 승경을 다루었으며, 모두 ‘대(臺)’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경관을 담고 있다. 제7, 8수에 묘사된 광활한 들녘과 유유한 강은 남도의 풍요로움을 느끼게 하는 핵심적인 풍경이라는 점 또한 주목된다. 순창의 원경을 펼쳐 보이면서 풍족함과 태평함을 언급하며 대단원을 삼았던 것이다.
순창 팔경가 (淳昌 八景歌)
'금산(錦山)에 봄이드니 꽃과 버들은 붉음과 푸름을 다투는데 무릉의 범나비는 간곳마다 꽃이로다 아이야 술부어라 취코 놀게
헌납(獻納) 바위 맑은 폭포 사시무궁 괘장천(掛長川)을 황계백주(黃鷄白酒) 남은 흥은 청가일곡(淸歌一曲) 한가하다 아마도 무한풍경은 이 뿐인가 하노라
대숲동(竹林村)의 녹죽(綠竹) 노는 군자 어대가고 적막공산의 일대 풍죽 되었느니 우리도 풍상을 격고셔 임자다시 만나자
응향지(凝香池)에서 배를 타고 놀았으니 연꽃도 좋거니와 월영수영(月影水影)은 은은한데 가지마다 낙화로다 지금에 이적선(李謫仙, 이백)
소자첨(蘇子瞻, 소식)은 어대 간고
아미산(峨眉山) 솟은 달이 초당에 들었도다 술먹다 다시보니 미산미월(眉山眉月)이 분명하다 미산의 솟은 달은 보름에도 미월인가
귀래정(歸來亭)에 달이 밝았으니 이태백과 놀러 나가세. 전필언(全弼彦)은 황계백주, 이종현(李鐘鉉)은 채소 반찬에 현미밥을 들고 오니 그중에 날낭은 풍뉴와 기생이나
우연히 장대(壯臺)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무변초색 너른 뜰 곳곳이 백곡(百穀)이라 아마도 태평성대는 금세(今歲)신가
적성강(赤城江) 가랑비에 사립쓴 저 어옹(漁翁)아 백구(白鷗)를 이웃하여 사시수월(四時水月) 한가하다 우리도 그대를 좇아서 누대(樓臺) 풍경이나 바라보리
이세보의 부친 이단화(李端和, 1812~186)가 순창군수(1860, 철종1년)로 있을 때 지은 팔경가로 우리 말 옛글을 옮겨면서 조금 다를 수 있다. 이 해 1월 2일부터 11월 18일까지 군수로 재직, 당시 29세 였던 그는 순창의 아름다운 모습에 매료됐다.
이같은 내용을 연구한 전주대 국어교육과 김승우교수의 연구에 박수를 보낸다.
이를 만든 배경이나 계기를 각종 읍지와 고지도, 더 나아가 순창을 읊은 시들을 통해 종합적인 검토를 갖는다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이세보는 1월에 아버지를 따라 순창에 왔다. 진산 금산은 관아 뒤편을 감싸고 있는 산으로 가장 먼저 볼 수 있었다. 헌납암에서 바라보는 폭포수는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자못 궁금하다. 며칠 전 찾아본 순창에 봄기운이 넘쳐나고 있었다. 구미마을의 기나긴 고샅 담장에 봄풀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리라./이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