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의 '탁류 '등 음식 이야기
‘선창은 분주하다. 크고 작은 목선들이 저마다 높고 낮은 돛대를 옹긋중긋 떠받고 물이 안보이게 선창가로 빡빡이 들이밀렸다. 칠산 바다에서 잡아가지고 들어온 젓조기가 한창이다. 은빛인 듯 싱싱하게 번쩍이는 준치도 푼다. 배마다 셈 세는 소리가 아니면 닻 감는 소리로 사공들이 아우성을 친다. 지게 진 짐꾼들과 광주리를 인 아낙네들이 장속같이 분주하다.
강안(江岸)으로 뻗친 찻길에서는 꽁지 빠진 참새같이 방정맞게 생긴 기관차가 경망스럽게 달려다니면서, 빽빽 성급한 소리를 지른다. 그럴라치면 멀찍이 강심에서는 커다랗게 드러누운 기선이, 가끔가다가 우웅 하고 내숭스럽게 대답을 한다. 준설선이 저보다도 큰 크레인을 무겁게 들먹거리면서 시커먼 개흙을 파 올린다. 마도로스의 정취는 없어도 항구는 분주하다‘
군산을 배경으로 1930년대 식민지 사회상을 날카롭게 풍자한 채만식 소설 ‘탁류’의 앞부분이다.
5월 초순 어느 날, 군산 째보선창 풍경을 전하고 있다. 예전엔 매년 곡우에서 입하 사이에 조기 파시가 섰다. 어상자가 없던 시절이어서 생선을 바닥에 무더기로 쌓아놓거나 광주리에 담아 경매했다.
'오늘도 정주사는 듬뿍 삼 원 돈을 지니고서 한바탕 거들거리고 하바를 하던 판이다. 이삼 원의 대금(大金)은 마침 가게에 북어가 떨어져서 아침결에 어물전으로 흥정을 하러 가던 심부름 돈이다. 배고픈 호랑이가 원님을 알아볼 리 없고, 무슨 돈이 되었든지 간에, 마침 또 간밤에는 용꿈을 꾸었겠다 하니, 북어값 삼 원을 밑천으로 든든히 믿고서 아침부터 붙박이로 하바를 하느라 깨가 쏟아졌다. 그러나 따먹기도 하고 게우기도 했지만, 필경 끝장에 와서 보니 옴팡 장사다. 밑천이 절반이나 달아나고 일 원 오십 전밖에 남지를 않았던 것이다. 미두장의 장이 파하자 뿔뿔이 헤어져가는 미두꾼 하바꾼 틈에 끼여 나오면서 정 주사는 비로소 잃어버린 북어값을 생각하고 입맛이 찝찝해 못 한다 '
‘탁류’는 식민지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 양상을 깊이 파헤친 작품으로 평가받는 문학사의 문제작이다.
군산이 고향인 시인 고은 씨는 대하시집 '만인보' 7부에 째보선창의 주모와 갑술이, 천 씨를 올려놓고 있다.
'거기다 (배)대고/아 이놈들아/어서 술 먹으러 올라와/술국 끊였다/이 씨부럴 놈들아 어서 와…'('째보선창 주모' 일부).
혼자 낄낄거리던 갑술이와 뱅어잡이 나갔던 천 씨는 어디로 갔을까.
1936년 5월 11일자 동아일보엔 금강 하류의 뱅어잡이 배들이 보인다.
‘명태’는 1943년 '신시대' 1월호에 발표한 글이다. 일제 탄압이 극렬했던 시기였고 친일적인 글을 써야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식민 치하 지식인의 자괴감과 명태가 한국 식문화에서 가진 정서적 의미를 함께 녹여낸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이다.
‘배를 타고 내장을 싹싹 긁어내어 싸리로 목줄띠를 꿰어 쇳소리가 나도록 바싹 말랐다. 눈을 모조리 뺐다. 천하에 이에서 더한 악형도 있을까. 모름지기 명태 신세는 되지 말 일이다’
이 부분은 명태를 다루는 모습을 사실감 있고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 수필은 구수한 사투리와 반가운 구어체, 맛깔난 표현이 가득해 읽는 이로 하여금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한다.
'망치로 두드려 죽죽 찢어서 고추장이나 간장에 찍어 막걸리 안주로는 덮을 게 없는 것이 명태다. 쪼개서 물에 불렸다 달걀을 씌워 제사상에 괴어놓는 건 전라도 풍속, 서울서는 선술집에서 흔히 보는 바 찜이 상(上)가는 명태 요리일 것이다. 잘게 펴서 기름장에 무쳐 놓으면 명태자반이요, 굵게 찢어서 달걀 풀고 국 끓이면 술국으로 일미다'
'산적'은 '별건곤' 1929년 12월호에 소개된다. '종로 행랑 뒷골 어느 선술집이다. 바깥이 컴컴 어둡고 찬 바람끝이 귀때기를 꼬집어떼는 듯이 추운 대신 술청 안은 불이 환하게 밝고 아늑한 게 뜨스하다. 드나드는 문 앞에서 보면 바로 왼편에 남대문만한 솥을 둘이나 건 아궁이가 있고 그 다음으로 술아범이 재판소의 판사 영감처럼 목로 위에 높직이 앉아 연해 술을 치고 그 옆에 가 조금 사이를 두고 안주장이 벌어져 있다 그러고 그리로 . 돌아서 마방간의 말죽 구유 같은(평평하니까 말죽 구유와는 좀 다를까?) 선반, 도마가 있고 그 위에 가 식칼, 간장, 초장, 고추장, 소금 무엇무엇 담긴 주발이 죽 놓여 있다. 안주 굽는 화로는 목로에서 마주보이게 놓여 있다.
그는 '매일신보' 1939년 9월 9일에 '산채'를, '박문' 1940년 4월에 '애저찜'을 발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