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제현과 이규보
이규보는 고려 때 전주목 사록(司錄)을 하다 떠난 뒤 ‘운제현’에서 홍수가 났다는 말을 듣는다. ‘운제는 내가 전에 다스리던 완산(完山)의 속군(屬郡)이다. 그 고을이 암곡(巖谷) 사이에 있어 산이 높고 험하기로는 다른 군에 비하여 으뜸이고 또 강이나 바다를 끼고 있지도 않았는데, 하루저녁 장맛비에 산이 무너지고 물이 소용돌이 쳐서 한 고을이 몽땅 떠내려갔으므로 죽은 이민(吏民)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고 나무 위에 올라가 겨우 목숨을 건진 사람이 열에 한둘 정도였다 한다. 완산의 옛 관리가 와서 나를 찾아보고 경위를 자세히 들어 말하고서 ‘이 고을에는 옛적부터 일찍이 이와 같은 피해가 없었는데 이제 와서 이런 일이 있으니, 이 무슨 재변입니까?’ 하므로, 내가 측은하게 감탄하면서 시를 지어 애도했다'
운제현(雲梯縣)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완주군 화산면, 운주면 일대에 설치되었던 지방통치구역이다. 운주면은 옛 운제현의 동쪽이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대에 백제의 지벌지현(只伐只縣)을 바꾼 이름으로 고려시대에 운제현이라 불렸다. 1392년(태조1년)에 고산현에 통합됐다. 그는 칠월 삼일 ‘운제현’ 에 큰물이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지었다. ‘한 나라가 일어난 지 삼십 년에 황하가 산조현에서 터졌고 그뒤 원광 연간에 이르러 또 호자에서 터져서 설상이 이미 떠내려갔고 동쪽의 회수와 사수로 쏟아져 들어가니 긴 대나무와 돌들이 재앙을 당했고 스스로 백성만 번거롭혔을 뿐이었지 이는 비록 옛날의 차탄하던 바였지만 또한 하수가에 살았기 때문이었네 내가 일찍이 운제를 보니 바로 산 속에 있었네 산은 백 길이나 높았으며 흙탕물이 닿지 않는 곳이요 곁에는 한 가닥 냇물도 없었는데 큰 물이 어디로부터 밀어닥쳤을까 설사 하늘에까지 창일하는 수재가 있을지라도 산에 의지하면 오히려 피할 수 있었는데 하물며 올해의 비는 평지에서도 겨우 한 자 남짓 했음에랴 강 곁의 여러 고을도 떠내려간 집이 하나도 없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산 속 고을이 도리어 물고기 집으로 변하였는가 처음 듣고는 미덥지 못하여 혼자 마음으로 그럴 리가 없다 하였는데 오늘 아침 옛 관리 만나서야 자초 경위를 자세히 알았네 물이 산을 덮친 것이 아닌 산이 예측 밖의 물을 토하여 비유컨대 지붕에 물병을 세우고 아래로 쏟는 형세와 같아 중지시키기 어려웠다네. 어찌 가장 높은 봉우리에 나는 새가 앉을 만한 곳이 없었으랴마는 물이 산으로부터 쏟아졌으니 올라갈 길을 어느 겨를에 찾겠는가. 오직 오래된 고목나무 가지가 높아서 자못 믿을 만하여 빠른 사람은 가장 먼저 올라가 원숭이처럼 까마득히 매달려 있고 느린 사람은 올라가지 못한 채 물에 빠져 푸푸거리며 놀란 눈알 희번덕거렸으니 하물며 파리하고 약한 사람이랴 마름같이 떠서 물결따라 떠내려 가다가 돌에 받쳐 으깨어지기도 하고 뗏목따라 이곳저곳으로 흩어지기도 하였네 비 그치고 물결 다시 마르니 그 혼란한 상황 어찌 차마 볼 수 있겠는가 그중에 교활한 아전들이야 비록 죽더라도 이치에 당연한 것이 평소에 그 얼마나 침탈하여 백성의 고혈로 제 몸 살찌웠던가 하지만 어리석은 백성이야 무슨 죄인가 하늘의 뜻 참으로 모르겠네 우 임금 다시 나지 않으니 늙은이 부질없이 눈물만 흘리네’
옛날 신라가 백제를 이기고 이 땅을 점령 ‘운제현(雲梯縣)’이라 한데서 비롯하니 1,300년을 이어 온다. 그런데 아전의 ‘행위’가 나빴기 때문에 행장을 숨겨야 했지만 그대로 썼다. 그는 ‘남행월일기’를 통해서도 운제현 사연을 적었다. 마령과 진안 사람들은 얼굴이 잔나비 같고, 꾸짖거나 나무라면 놀란 사슴처럼 금방 달아날 듯 사람됨이 질박(質朴)하여 꾸밈이 없고, 술상이나 음식은 문화가 뒤떨어진 야만적인 풍모기 엿보인다고 하였다. 산을 감돌아 운제까지 갔고, 운제를 지나 고산까지 가는 데는 길이 좁고 고개가 만 길이나 높이 솟아 있어 말을 타고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운제현 일대는 이번에도 비 피해를 입었다. 빠른 복구를 바란다./이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