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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킬링필드

이종근의 행복산책 2020. 8. 5. 14:49


캄보디아 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킬링필드(Killing Field)'다. 20년 내전과 베트남 전쟁의 불똥으로 희생자의 최대치는 150만 명에서 200만 명까지 올라간다. 1950년 전주는 한국의 킬링필드였다. '전주형무소(구 전주교화소) 학살 사건'은 한미연합군이 서울 탈환을 앞둔 1950년 9월 26일 자정 무렵부터 27일 이틀간 북한군이 전주형무소에 수감된 우익 인사 1,000여명 가운데 500여명을 곡괭이와 삽 등으로 학살한 사건을 일컫는다. 전주형무소 밖에서도 많은 이들이 죽었다. 장로교신학병원(현 전주예수병원) 근처 채석장, 완주군수 사택 안마당 방공호, 천주교회 앞 방공호 등에서 50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적혀 있다. 필자는 한벽당도 학살 장소임이 분명한 자료를 보았다.

다음은 올해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발간한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의 내용중 일부다. '(1950년 9월) 27일 오후 5시경 희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전주형무소의 문을 개방하여 수감자 전원을 석방하고 공산군은 도주한다는 것이었습니다.(중략) 이때 내게 가장 급한 문제가 두 동료를 찾는 일이라고 생각해 마침 전동성당 구내에 공산군이 버리고 간 트럭이 있기에 즉시 청년 몇을 데리고 형무소로 찾아가 보았으나 눈에 띄지 않아 한벽당이란 학살 장소로 갔습니다'

전기수(그레고리오, 1922~1950)와 고광규(베드로, 1925~1950)신학생과 함께 전주로 피난을 온 동창생 김 안토니오 광주대교구 김정용 신부(2005년 선종)의 증언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예수병원 자리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온 산을 다 찾아본 결과 언덕 방공호 속에 학살된 시신들이 무수히 있음을 발견하고 그 시신을 헤쳐 보았더니 시신이 있었다. 온 몸뚱이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두골이 상해 있어 타살된 게 분명했다. 이 둘은 목포출신이었으며 서품 현황을 살펴보면 전기수는 4품(시종직), 고광규는 삭발례로 1950년 9월 25일 피체돼 다음달 피살됐다. 부주교 김현배 바르톨로메오 신부의 주례 아래 연미사를 봉헌하고 치명자 이(순이) 루갈다 무덤 아래 고이 안장했다. 전주교구의 김 바르톨로메오 주교 등 신부와 수녀들은 공산군이 들어오자 김제 수류성당에 피신해 있다가 서울서 피난해온 유봉구(아우규스티노), 임응승(사도 요한) 두 신부와 함께 피랍돼 전주 감옥에서 갖는 고초를 겪었으나 구사일생으로 모두 살아나게 됐다.

한국전쟁 전후로 전주교도소 등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 유해가 다수 묻힌 것으로 추정한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다 되가는 시점에서 유해발굴을 통해 아픈 역사를 치유하도록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이종근(삽화 새전북신문 정윤성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