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쏘기’ 국가무형문화재 제142호 지정....전주 천양정
문화재청은 지난달 30일 ‘활쏘기’를 국가무형문화재 제142호로 지정했다. 우리나라의 활쏘기는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狩獵圖)>,『삼국지(三國志)』「위지 동이전(魏志 東夷傳)」을 비롯, 고대 문헌에 등장하는 등 오랜 역사를 지닌 점, 활쏘기와 관련된 무형 자산 이외에도 활·화살, 활터 등 유형 자산이 풍부하게 남아 있는 점, 우리나라 무예의 역사와 전통사회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았다.
나주 인덕정 사대 앞 뜰에 보면 한자어로 '백보천양(百步穿楊) 삼년관슬(三年貫蝨)'이란 말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백보 거리에서 버드나무 잎을 맞히고 삼년이면 이를 꿰뚫는다'라는 말로, 이는 매우 뛰어난 활솜씨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이는 고대 중국의 명궁인 양유기(養由基)와 기창(紀昌)의 고사에서 유래됐으며, ‘천양’과 ‘관슬’의 고사가 합쳐져 이루어진 성어이다. 초(楚)나라의 양유기는 활을 잘 쏘아 100보 떨어진 곳에서 버드나무 잎을 맞혔는데, 100번을 쏘면 100번 모두 명중했다고 한다. 그는 백보 밖의 버드나무 잎에 빨간 점을 그려 놓으면 그 점을 명중 시키는 실력이 있었다. 양유기가 초나라 공왕을 따라 전쟁에 나갔는데, 초 공왕이 진나라의 장수 위기(魏奇)의 화살에 맞아 눈을 다쳤다. 공왕이 양유기를 불러 화살 두 개를 주고 위기를 잡으라고 하자 양유기가 단번에 위기를 명중시켜 절명시키고 화살 한 대를 반납했다. 공왕이 크게 기뻐하고 “양일전(養一箭)이로다! 백보천양 (百步穿楊)이 사실이로구나!” 라고 했다.
‘관슬’은 ‘관슬지기(貫蝨之技)’라고도 한다. 옛날 중국에 감승(甘蠅)이라는 명궁이 있었는데, 달리는 짐승이나 나는 새를 쏘아 빗맞히는 일이 없었다. 감승의 제자인 비위(飛衛)는 스승보다 활솜씨가 더 뛰어났다고 한다. 기창(紀昌)이라는 사람이 비위에게 활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비위는 눈을 깜빡거리지 않는 방법을 먼저 익히고 나서 다시 오라고 했다. 기창은 집으로 돌아가 아내가 일하는 베틀 밑에 누워서 왔다 갔다 하는 북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리지 않는 훈련을 했다. 2년이 지나 송곳이 눈앞에 와도 눈을 깜빡거리지 않게 되자 기창은 다시 비위를 찾아갔다. 비위는 아직 부족하다며, 작은 것이 크게 보이고 희미한 것이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보는 훈련을 쌓은 뒤에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기창은 가는 털에 이를 묶어 창문에 매달아 놓고는 매일같이 바라보았다. 열흘이 지나자 이가 조금씩 크게 보이기 시작하더니 3년이 지난 뒤에는 수레바퀴만하게 보였다. 기창은 아주 조그만 활과 화살을 만들어 이를 쏘아 꿰뚫었는데, 이를 묶어 놓은 털은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貫蝨之心, 而懸不絶)기창이 다시 비위를 찾아가 사실대로 말하니, 비위는 "그대는 이미 활쏘는 법을 터득했다"고 말하며 좋아했다고 한다.
전주 다가산의 ‘다가(多佳)는 ‘아름다운 사람 많아 미인은 얼굴이 옥과 같다네(多佳人美者顔如玉)’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완산8경’의 하나인 ‘다가사후(多佳射侯)’는 ‘다가 천변 활터에서 활 쏘는 모습’을 말하며, 주 무대는 천양정(穿揚亭, 전북문화재자료 제6호)이다. 이 정자는 조선시대에 한량들이 활쏘기 연습을 위해 활터에 세웠다. 숙종 38년(1712)에 다가천 서쪽 냇가에 세웠으나 얼마 후 홍수로 떠내려 가버렸다. 그 뒤 경종 2년(1722)에 다가산 밑에 다가정(多佳亭)이란 정자를 짓고 활터로 사용했다. 순조 30년(1830)에는 이곳에 또 다른 정자를 세우고 옛 이름을 따서 천양정이라 했다.
혹자는 천양정 입구 안내문에 적힌 글귀처럼 “‘천양(穿楊)’이란 뜻은 버들잎을 화살로 꿰뚫는다는 것으로, 신묘한 활 솜씨로 이름 높았던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고사에서 유래한 유래한 말”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설화나 전설 등의 관련 내용을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이성계와 버들잎에 얽힌 이야기는 신덕왕후 강씨와의 설화가 전부다. 이성계가 황해도 곡산으로 사냥을 나가 온 종일 짐승을 찾아 헤매다가 사슴 한 마리를 발견하고 급히 쫒았고 한참을 달리다 보니 우물가에서 물을 긷는 처녀가 있어 물 한 모금을 청했더니 그 처녀는 물바가지에 버들잎 하나를 띄워 건넸다는 이야기가 그것으로, 적어도 이성계와 천양은 과장된 말이다.
옛날 활쏘기에 능한 이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 화살이 버들잎을 꿰뚫는 ‘천양(穿楊)의 명궁’ 정도는 흔했고, 벼룩을 쏘아 관통시키는 ‘관슬(貫蝨)의 신궁’도 있었다고 전한다. 고구려 건국시조 주몽의 이름은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조선 창업주 이성계는 궁술로 홍건족 적장을 제압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처음 알렸다. 지정 명칭을 ‘활쏘기’로 한 것은 활쏘기가 고려 시대와 조선시대 문헌에서 확인된 순수한 우리말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지정된 활쏘기는 사대(射臺)에 서서 두 팔로 전통 활과 화살을 이용하여 과녁에 맞추는 행위로, 전국 활터를 중심으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라는 점에서 씨름(국가무형문화재 제131호)과 마찬가지로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보유자나 보유단체 인정 없이 종목만 지정된 국가무형문화재는 아리랑(제129호), 제다(제130호), 씨름(제131호), 해녀(제132호), 김치 담그기(제133호), 제염(제134호), 온돌문화(제135호), 장 담그기(제137호), 전통어로방식–어살(제138-1호) 등 모두 9건이다. 활쏘기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인가./이종근(문화교육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