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병역비리가 있었다
전북 무장현(茂 長縣) 이동면(二東面, 현 고창군 무장면)에 사는 김광팔(金光八)은 기사년(己巳年) 3월에 무장현감에게 올린 소지(所志)로, 전북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고5632-1)다.
‘이동에 사는 김광팔
아래와 같이 삼가 진술하는 소지(所志)는, 이번에 쇄환(刷還)하는 관노(官奴) 용 안(龍安)은 저의 아들인데 두세 달 앙역(仰役)을 하다가 곧바로 역(役)을 면제받 은 것은 대개 까닭이 있어서입니다. 이른바 용안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굼뜨며 천 성이 부랑자 같아서 동서(東西)의 방향과 한둘의 수를 알지 못하고 단지 노름과 여색만을 압니다. 이런 까닭으로 그 부형(父兄)이 되는 사람이 억제하여 구속할 방법이 없어서 어 쩔 수 없이 관노청(官奴廳)에 들이기를 원하였는데 뜻밖에 역을 면제받게 되었습 니다. 만약 용안의 사람됨과 비슷하다면 그 사람에게 관노는 당연한 소임입니다. 또 관노의 소임에는 고자(庫子)1)가 있고 급창(及唱)2)이 있는데, 천한 아랫사람들 이 그 일을 하기를 원하니 어찌 일찍이 피하려는 꾀를 내어서 돈을 들여서 면제 받기를 도모하겠습니까? 용안이 뜻밖에 역을 면제받은 것은 다만 저의 먼 근심 거리가 될 뿐만이 아니라, 또한 관가에도 반드시 비상한 폐단이 있었던 까닭으로 그 당시의 사또께서 또한 염려가 이에 미쳐서 특별히 역을 면제하여 주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지금에 이르러 갑자기 쇄환(刷還)3)하는 방안이 끝내 이와 같다면, 저는 이 땅에 서 살 곳을 정할 희망이 전혀 없고 관노청에 있어서도 어찌 돈을 바쳐서 의무 면 제를 허락받을 뜻이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감히 우러러 하소연하오니 헤아 리신 후에 제 아들 용안의 관노 의무를 면제해주시는 일로 분부를 내리도록 명령 해주실 일입니다. 관사주(官司主) 처분(處分) 기사년 3월 일‘
문서의 내용에 따르면 김광팔은 아들 용안(龍安)이 노름과 여색(女色)만을 일삼자 이를 제어할 목적으로 어쩔 수 없이 관노청(官奴廳)에 들어가게 했는데 몇 개월 만에 뜻밖에 역(役)을 면제받았다. 그런데 신임 수령이 부임한 후에 용안이 다시 관노로 소환되자, 김광팔은 소지를 올려 그간의 경위를 말하고 관청에 납부한 물품목록을 첨부해 용안을 관노에서 빼달라고 요청한다.
그는 아들이 사람됨이 우둔하고 성품이 부랑자 같으며 방향과 숫자도 몰라서 반드시 관가에 큰 폐단을 일으킬 것이라서 수령이 이를 헤아려 특별히 역을 면제했던 것이지, 절대 돈을 바쳐서 역을 면제받은 것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김광팔이 용안을 관노에서 빼기위해 얼마 정도의 돈을 썼을까? 시대의 정황을 통해 추측해 보더라도 아마 꽤 많은 비용이 들어갔을 것이다. 다행스럽게 이 에 관한 자세한 정보가 들어있는 문서가 남아 있다. 김광팔은 아들의 역을 면제 받기 위해 돈 46냥 3전과 무명 2필을 바쳤다.
김광팔은 이로부터 4년 뒤인 계유(癸酉)년에도 비슷한 소지를 올린다. 거주지가 탁곡면 신대(현 전북 고창군 아산면)로 바뀌었지만 마찬가지로 아들의 역(役)을 면제받기 위한 목적의 청원서이다.
‘탁곡면 신대에 사는 김광팔
아래와 같이 삼가 진술하는 소지는, 저의 서자(庶子) 용환(龍煥)은 본래 공노 비(公奴婢)의 소생에 속하여 관노(官奴)의 역을 수행(隨行)하다가 병신(病身) 은 관노에 적합하지 않다고 관노들이 일제히 하소연하여 관전(官前)께서 곧 바로 탈역(頉役)해 주신 까닭으로 외촌(外村)에 이거하여 이미 땅을 경작하는 농민이 된 것이 지금 6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후에 관노청에 납입한 것이 거의 50금(金)이나 다 됩니다. 뜻밖에 일전에 갑자기 쇄안(刷案)이 도착한 상황이오니, 대개 관노의 소임은 사람됨이 민첩하여 걸음 이 굳세고 빠른 연후에야 앙역에 합당하온데 지금 이 용환은 말이 반 벙어리여서 명령을 듣기에 합당 하지 않고 발은 발가락이 붙어 먼 길을 갈 수 없어서 관노의 소임을 수행할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연유(緣由)를 감히 우러러 하소연하오니, 제 아들 용환의 병상(病狀)을 하순(下詢)하신 뒤에 즉시 탈급(頉給)해주는 일로 분부를 내리도록 명령해주실 일입니다.
관사주(官司主) 처분(處分)
계유(癸酉)년 1월 일
관(官) 압(押)’
자신의 서자인 용환(龍煥)이 본디 관노로 일을 했는데 병 때문에 역을 면제받고 농사를 짓고 있으니 소환하지 말고 병의 상태를 살펴달라고 요청한다. 용환이 반벙어리에 발가락이 한 데 붙어있어서 관노의 임무에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앞에서 김광팔이 올린 청원은 성공했을까? 소지의 답변 부분을 보면, 수령은 ‘이미 납부를 원했다는 말이 있었는데 당사자를 또 어찌 쇄환한다는 것인가? 그 쇄환이 합당한지 아닌지를 상의하여 면해줄 일이 다.’라고 판결을 내리고 담당자인 호장(戶長)과 수노(首奴)에게 처리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3일 뒤에 호장은 영원히 역을 면제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고갔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전경목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아무튼 이러저러한 상황을 종합해 볼 때, 김광팔이 돈을 주고 아들을 관노청에 소속된 노비 임무에서 뺀 것은 확실하다. 아마도 용환은 어머니가 관비(官婢)였기 때문에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관청에 소속된 노비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인 김광팔은 어떤 신분의 사람이었을까? 용환을 서자(庶子)라고 한 것을 보면 일단 어머니와 같은 계층은 아니었다. 돈을 들여 아들의 역을 면제받고 관비를 첩으로 삼을 수 있는 계층이었으므로 경제력이 있는 양민(良民)이거나 양반이었을 것이다. 두 건의 소지에서 직역(職役)이 없고 ‘안전(案前)’ , ‘관전(官前)’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중인(中人)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사족(士族)이었다면 ‘민(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거나 노비의 이름으로 소지를 작성했을 것이다. 또 관노의 임무나 관노청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것은 그가 관아 내부의 사람이거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김광팔은 기사(己巳)년 처음으로 용안의 탈역을 목적으로 소지를 올리기 10년 전인 기미(己未)년에 행수군관(行首軍官)에 임명되었고, 용환 탈역 소지를 올리고 나서 4년 뒤인 정축(丁丑)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조련교사관(操鍊敎師官) 첩(帖)을 받는다. 그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기반이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즉, 김광팔은 기미년에 행수군관의 첩을 받았고 18년 뒤인 정축년에 가선대부로 조련교사관 첩을 받은 바, 이는 고위층 아들들이 정신적·육체적 구실을 만들어 병역을 면제받는 요즘의 현실과 비슷하다. 안타깝지만 이들 고문서들은 정확한 연도가 확인되지 않아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