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에는 땅 자체가 가지는 특징과 그것을 인식, 식별 및 인지하는 사람의 의식이 결합되어 있다. 그러니까 지명에는 땅이 가지고 있는 장소적 특성과 인간의 의지나 감정이 개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지명은 의미의 결합체인 것이다. 그래서 지명을 문화의 화석이라고 부른다.”(최창조) 우리들이 어느 장소를 가든 그 곳에는 일정하게 부르는 땅이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이름은 단순하게 붙여진 것이 아닙니다. 산의 모양, 전설, 신앙, 관습, 마을 위치 등과 관련되어 붙여집니다. 그래서 땅이름은 조상들의 풍속, 전설, 신화 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금평 마을숲(임실군 지사면 금평리)을 찾아가기 전, 근처 사촌(沙村) 마을을 우연히 찾게 되었습니다. 사촌(沙村) 마을의 우리말 이름은 ‘지사랭이’라 합니다. 이곳에 현이 있었을 때 ‘향교’가 있어서 성현에게 제사지내고 젊은이들이 공부도 하던 곳입니다. 그래서 ‘지사랭이’란 말은 ‘제사 지내던 곳’, ‘향교터’라는 말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사촌마을에 들어서면서 도로변에 조그만 표지석을 보고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 추진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을의 문화재나 사라진 유적, 지명에 대한 표지석이었습니다. 뒷면에는 간단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사창(沙倉, 社倉)들’(약 13만㎡ 쌀 옥토, 사질양토, 98년경 경리정리, 점질양토) ‘한방[大方]들’(약 5만㎡ 쌀논, 사질양토, 89년경 경리정리, 점질양토) ‘독다리들’ ‘독다리[石橋] 매몰지’(영천리 1207, 가로 세로 약 1,5m, 두께 약 50cm 경지정리 때 매몰) ‘깊은배미 물레방아터’(영천리 1027-1, 넘겨치기 2확, 쌀방아) ‘아래뜸 디딜방아터’ ‘옥터거리’ ‘빨래터’ ‘전진바우’ ‘부부암’ ‘징검다리터’ ‘사촌입석’(앞면: 마을경계석, 남쪽 수호석, 영천리 664-1 뒷면: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청동기 시대로 추청, 냇가 선돌은 1948년 이교진씨가 마을 수구막이로 세움. 큰 도로변은 2004년 마을주민이 세움) ‘탑터’(뒷면: 위 영천리 1070, 아래 영천리 1030, 마을 허한 앞 비보) 등 표지석이 마을을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기록의 나라이면서도 마을 역사와 유래를 제대로 기록한 마을이 드물어 불분명한 경우가 많은데, 이런 측면에서 사촌마을 문화재 표지석 작업은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사촌마을 뿐 만 아니라 십이연주봉(十二連珠峰) 아래에 자리 잡은 마을마다 에코(Eco)박물관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금평마을 역시 기록과 전통 문화가 잘 남아 있습니다. 금평(琴坪)마을은 본래 금곡(琴谷), 개금실이라 불립니다. 옥녀봉 아래에 자리 잡은 금평마을은 풍수적으로 옥녀가 거문금을 타는 옥녀탄금(玉女彈琴)형국에서 기인합니다. 마을 뒷편에 가칭 금평문화재 1호인 ‘거문고을 타는 술대바위’가 있습니다. 금평 마을은 전주 최씨 집성촌이며 특히 원불교 교우촌입니다. 일찍이 최도화 선진님이 원불교를 포교하여 전체 주민이 원불교 신도이며 원불교 금평 교당(1945년 설립)이 마을 한가운데 자리합니다.
금평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돌탑과 목·석 장승, 그리고 짐대가 세워져 있습니다. 마을에서 돌탑이 세워지게 된 것은 마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자주 발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을에서 논의한 결과 도깨비에 의해 화재가 발생한다고 생각하여 도깨비 안식처로 돌탑을 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화재가 발생하지 않고 평온하게 마을사람들이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1970년대 새마을 운동 무렵에 돌탑을 해체하여 마을 안길 축대로 쌓으면서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마을 수호신이었던 돌탑이 없어지자 마을사람들이 허전하여 2011년에 다시금 세워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을사람들은 돌탑을 ‘도깨비 안식탑’이라 이름 짓고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지석에 남겨 두었습니다.
금평 마을숲은 입구에 자리 잡은 소나무 숲입니다. 50여 그루 정도 되는 마을숲은 마을을 비보(裨補)하는 역할을 합니다. 소나무 숲 길 건너편 3그루의 참나무도 마을숲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마을숲 근처 입구에 돌탑과 목·석 장승, 그리고 짐대가 자리하는 바, 모두 마을을 비보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또한 이곳에는 의미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본래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군용 배를 만들기 위해 벌목하여 없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주 언급한 이야기지만 마을숲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느티나무가 없어진 그 자리에 1965년에 다시금 느티나무를 심고 그 의미를 표지석에 남기고 마을사람들이 보존하고 있습니다. 표지석에는 “차후 이 정자나무는 어떠한 경우라도 마을주민들의 허락 없이는 벌목 또는 이식할 수 없음을 엄중히 경고함”에서 마을주민들의 느티나무에 대한 의식을 엿 볼 수 있었습니다./이상훈 마령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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