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백(望百)의 세월 동안 화가로서 한 길을 걸어온 하반영옹(94세, 군산시 영화동 거주)은 끊임없는 도전과 작품으로 우리의 한 시대를 다양하게 수놓고 있다.
한국 서양화단의 산증인인 그는 미수(米壽)전, 구순(九旬) 전 등을 거뜬히 소화해 내면서 대한민국의 현역 활동 화가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원로중의 원로 예술인으로 개인전을 치른 횟수만도 100회가 넘는다.
특히 그는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살려 이를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삶, 그리고 그를 둘러싼 그의 그림 이야기는 또 하나의 작은 빛이 되어 우리의 삶을 고스란히 비춰 준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그를 일러 ‘동양의 피카소’라고 한다. 편집자
△ ‘동양의 피카소’라는 닉네임은 본인이 직접 붙인 것인가
아니다. 남들이 만들어준 닉네임이다. 아마도 피카소처럼 역사를 똑바로 바라보고, 다양한 소재를 다재다능(도자기, 한국화, 서양화, 수채화 등)하게 구사해 그렇게 불리우고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고 원색을 많이 쓰면서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한 점의 그림으로서 전 세계가 평화를 갈망하게 하지 않고 있는가. ‘아비뇽의 아가씨들’, ‘세 악사’, ‘우는 여인’. 우리는 어디서든 이 세 제목을 접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셋은 모두 일반 민중 생활의 참상과 고독감을 독특한 기법을 통해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입체주의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대표작들이다.
피카소의 그림은 특이하다. 그리고 기괴하기까지 하다. 다른 화가의 그림들에서는 찾기 힘든 피카소 고유의 형태분리 표현주의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그림에서 시선을 뗄 수 없게 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처럼 사랑 받는 그가 한 장의 그림으로 그의 조국 스페인의 비참한 현실을 알리려고 했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아비뇽의 아가씨들’과 함께 그의 대표적인 역작으로 꼽히는 ‘게르니카’가 바로 그 대작이다.
△ 다작으로 인해 그림을 너무 빨리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지적이 있는데
예술 활동에서 다작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례로, 중국 송나라의 문장가인 구양수는 글을 잘 쓰는 비법으로 다독과 다작, 다상량을 이야기 하지 않았나. 이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글을 많이 읽고 쓰며,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찍이 전통산수화의 대가 남농 허건(1908∼1987)화백이 나더러 작품 한점씩을 그려 전남 도민 모두에게 나눠 줄 마음이 있을 정도로 작품에 목말라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20만장의 작품을 모두 그릴려면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그게 한이라고 했다. 많은 화가들이 아이디어가 없어서 다작을 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내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좀더 많은 작품을 남기고 싶다
△ 나이가 많아 작품 활동에 지장은 없는가
일곱 살때부터 그림을 시작했으니 올해로 87년 동안 그림과 같이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물론 예전처럼 왕성하게 활동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하루에 3-4시간씩 붓을 잡고 있다. 80년 넘게 화력을 쌓아오고 있지만 아직도 나의 예술은 미완성 그대로다.
매일 새벽 5시 무렵에 일어나 아침 한 끼만의 식사를 하며 철저한 고독 속에서 특별한 성소(聖召)인 그림을 통해 조물주의 위업을 증거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나는 화공(畵工)이다. 화공은 그림으로, 노동자는 노동으로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이 당연한 아닌가. 나는 종교는 없지만 그림으로 밥을 먹게 해준 조물주께 항상 감사한다. 그래서 그 보답으로 그림을 그려 사회에 이바지하고 있다. 후배들을 위해 반영미술상을 제정한 것이 바로 그것이며, 요즘도 돈을 보태 독거노인들과 소년소녀가장, 독립유공자들에게 때론 금전을, 때론 물건을 통해 마음을 나누고 있다.
△ 예전에 그림을 한다고 할 때 주위 사람들의 반대는 없었는가
13세 때 금릉 김영창선생의 권유로 조선총독부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나팔꽃이 있는 정물’을 유화로 그려 익명으로 출품했다. 그때 최고상인 조선총독상을 수상했었다. 그러나 그의 집안에서 이 사실을 알고는 “양반 가문 장손으로 어찌 ‘환쟁이’가... 너는 이제 우리 자식이 아니다”하고 역정을 냈다. 일찍이 서당 훈장도 그의 재능을 알아봤고, 군산에서 보통학교를 다닐 때 농업을 가르치던 도게 모이치 교장 선생은 자신의 수업시간에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배려했고, 미술교사 이노우에 사이키 선생은 그를 일본에 데려가려고 했었다. 그런데도 유독 그의 집안에선 그림 그리는 일은 양반 집안에선 있을 수 없는 ‘아랫것들이나 하는 상스러운 짓’으로 여겼다. 하지만 집안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미련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집을 뛰쳐나왔다. 열네 살에 집을 나온 그는 바람과 구름을 벗 삼아 조선과 만주 등지를 떠돌며 남의 집 머슴살이도 하고, 부두 막노동과 간판 집 허드렛일도 하면서 서럽고 고달픈 나날을 보냈다. 나중에 그의 집안에서 그를 찾는다는 소문이 들리자 성과 이름을 ‘하반영’으로 바꿔 버렸다. 이는 그림을 반대하는 집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하옹은 원래 이름은 김구풍이란다. ‘하반영’은 ‘냇가 논 반마지기에 어룽거리는 그림자’라는 뜻이다. 원래 부모는 만석꾼 부자였으나 집을 나온 나는 가난한 화가의 길을 걷고 있으니 이 이름이 잘 어울린다 싶어 그렇게 지었단다.
△ 도종환의 ‘바람꽃’이 연상될 정도로 삶에 풍파가 많았다고 들었는데
우연히 전주에서 만난 옛 스승 김영창선생이 한 마디를 했다. “너는 재주는 있지만 그림에 전념하지 못하니 다른 사람보다는 그림이 늦게 될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과연 김영창선생의 예상은 적중했다. 화가의 등용문인 국전에 35세부터 57세까지 일곱 번 출품해 일곱 번 입상하고, 민전 목우회 공모전에서 세 차례 특선해 일단 국내에선 예술적 기량을 충분히 인정받았으나, 61세에 비로소 프랑스 국전 ‘르 살롱’전과 ‘콩파레종’전에서 각각 금상을 수상함으로써 국제무대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대기(大器)는 만성(晩成)이라고 했던가. 그가 ‘자신만의 사상과 혼이 담긴 그림을 그릴 줄 아는 화가’로서 입신하는 데 자그마치 25년이나 걸렸던 것이다. 이 긴 세월 동안 가난과 좌절, 피로와 싫증, 눈물과 고통을 실컷 맛보았으나, 예술을 택한 탓으로 일반인에 비해 농도가 더한 인생의 소금이나 다름없었다. 국내의 사정이 좋지 못해 1979년 말 프랑스로 건너간 그는 1985년까지 머물면서 400년 전통을 자랑하는 프랑스 국전 ‘르 살롱’ 공모전에 프랑스 교외의 바르비종의 가을 정취를 그려 금상을 수상했고, 또 ‘콩파레종’ 공모전엔 독수리 한 마리가 유유히 바르비종의 밀밭을 날고 있는 모습을 그려 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올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국위를 선양한 이 같은 수상 소식은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반영은 10호 크기의 캔버스에 옛 도자기, 명태 머리, 밧줄, 달걀을 적절히 배치, ‘처절했던 광주’를 상징하는 정물화를 그렸다. 구상화에서 풍경, 인물화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지만 요즘은 추상화 작품 중심으로 미술 애호가들을 만나고 있다.
△ 작품에는 이데올로기가 들어가야 한다고 곧잘 강조를 하는데
이데올로기를 통해 현실을 비판하고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어야 하는 게 작가들의 숙명이 아닌가. 특히 한국의 전통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작품의 생명력이 용솟음친다.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서양화를 잘 그린다고 해도 서양인들과 맞서기는 어렵다. 재질은 물감으로 하되, 그 바탕엔 동양적 사상과 사고의 가치가 살아꿈틀거리는 소재들을 조형화, 지금까지 선보이게 된 진정한 연유다. 작품 가운데 ‘하나가 되어도’는 통일을 염원하는 백의민족의 아픔을, ‘소말리아 스크린’은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을, ‘금강산 신선암’은 금강산의 아름다움과 남북의 미래를, ‘명태’ 작품은 고향이 그리워도 가지 못하는 피난민들의 삶을 담아냈다. 새전북신문 이종근기자
하반영화백이 걸어온 길
▲1918년 3월 1일 경북 김천에서 출생
▲금릉 김영창선생 사사
▲수상:조선총독부 최고상, 민전 목우회 특선, 프랑스 파리꽁바르종 공모전 금상, 미주평론 가협회 공모전우수상, 한국예총 창립 20주년 미술부문 공로 대상, 전주시민문화상, 광 복50주년 미술부문상, 전북인대상, 대통령표창, 목정문화상 등 수상
▲전시 경력:개인전 1백여 회(홍콩, 일본, 뉴욕, 캐나다, 프랑스, 한국 등)
▲각국 국제전, 단체전 300여회 출품, 3인전(박민평, 유휴열) 20여 회
▲경력:아시아 미술문화협회 공모전 운영위원장, 상촌회 원로작가회 회장, 한.일교류전 운영 위원장, 일본 중앙미술협회 초대작가 겸 심사위원, 프랑스 미술 회원 등
▲기타 :1994년부터 반영미술상 제정, 예술의전당, 한국보훈협회 등 작품 소장. 한국현대미 술 100년사 전북명사, 한국인물사, 국가상훈 인물오천년 사전 현대사 수록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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