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스토리

한국의 석탑, 조형예술의 백미(Ⅲ)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만든 벽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 탑을 말한다. 국보 제16호로 지정된 안동 신세동 칠층 전탑(경북 안동시 법흥동 8-1)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법흥사에 속해있던 탑으로 추정되나, 탑 주위로 민가와 철도가 들어서 있어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탑은 1단의 기단(위로 7층의 탑신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8부중상(八部衆像)과 사천왕상을 세워놓았고, 기단 남쪽 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여 1층 몸돌에 만들어진 감실(불상을 모시는 방)을 향하도록 했다. 진한 회색의 무늬없는 벽돌로 쌓아 올린 탑신은 1층 몸돌에 감실을 마련하였고, 지붕돌은 위아래 모두 계단 모양의 층단을 이루는 일반적인 전탑양식과는 달리, 윗면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국내에 남아 있는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에 속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또한 지붕에 기와를 얹었던 자취가 있는 것으로 보아 목탑을 모방해 전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년)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됐다.

 

 

 경주의 다보탑(국보 제20호)과 석가탑(불국사 삼층석탑, 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 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 너비, 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 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기단의 돌 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 상태가 가장 좋았을 듯한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 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한국의 석탑 중에는 일반형을 따르지 않고 특이한 모양을 지닌 것이 몇 기가 있는데, 이만큼 기발한 의장(意匠)으로 이루어진 탑은 없다.

 


 불국사 석가탑(삼층석탑)과 불국사 다보탑은 절의 대웅전 앞 뜰 동서쪽에 각각 세워져 있는데, 서쪽탑이 삼층석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으로, 감은사지 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 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탑의 머리 장식(상륜부)은 파손되어 1973년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 장식을 본따서 복원했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 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되며 1966년 12월 탑을 완전하게 복원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여러 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호)이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진 두 탑 중 서쪽에 있는 탑이다.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일반형 석탑으로, 각 부의 비례가 아름다운 우수작의 하나이다.

 


 국보 제30호 분황사 석탑(경북 경주시 구황동 312)은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이다.

 

 

이 석탑은 돌을 흙으로 구워 만든 전돌처럼 깎아 만들어 쌓은 석탑으로, 전돌로 쌓은 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모전석탑(模塼石塔)이라고 부른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 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백제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대조를 이룬다. 무엇보다도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 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됐다. 전민일보 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