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진 폐선 위로 한낮의 햇볕이 변강쇠마냥 이글거린다. 한 여름의 열기가 화려한 색깔로 너울너울 춤을 춘다.
아득하니 그어진 수평선 너머로 바람결에 묻어오는 갯내음, 질주하는 설렌 가슴 한켠을 도려내어 쭉쭉쭉 푸른 물감을 짜낸다.
진한 슬픔은 우리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드리우고 있지만 동시에 차츰차츰 아물어가면서 모두가 부처님이 되고, 예수님이 되게 하는 이치.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온갖 시름을 날려보낸다. 저는 산봉우리처럼 높다랗게 솟아 올라 출렁이고 있지만 시시각각 5욕7정을 떠밀어내는 마술사.
갈매기 울음, 뱃고동 소리에 이별의 회한 뒤로 한 채, 커피 한 잔 타마시면 얼음 녹듯 사라져 이내 삶의 무게가 솜털처럼 가벼워짐을 느낀다.
내 꿈의 부피마다 번지는 수채화를 이제 막 갈무리한다. 황홀하고 짜릿한 손맛이 깃들 무렵, 바람은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연주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색깔을 달리하는 바다는 황홀함 그 자체. 꿈결처럼 미끄러지는 돛단배는 그리운 향기 입에 가득 물고 꿈찾아 희망찾아 봄 마실도 사뿐사뿐.
수채화가이자 의사인 최인수(최인수소아청소년과 원장)씨가 투명함 흠뻑 담은 ‘바다 이야기’란 작품은 그래서인가, 화폭엔 금세라도 변산반도의 바닷물이 들듯 투명한 자태를 뽐낸다.
작가는 세속의 풍파를 넘어 진솔한 풍경화, 마치 득화의 경지에 오른 정제된 수채화를 선보이면서 오로지 자연에서 느낀 감명을 담담하고 소박하게 화폭에 담아오는 등 내면의 따사로움을 그대로 펼쳐놓는다.
섬세한 묘사력을 바탕으로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감각이 요구되는 수채화적 특성을 십분 발휘해 대담한 색감과 터치로 캔버스를 채우고 있는 것.
3회의 개인전을 치르기도 한 작가는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등 전국 규모의 공모전에 출품 20여 회의 수상 경력을 갖고 있으며, 물빛수채화회, 한국미술협회, 한국수채화협회, 색깔로 만든 사람들, 한국의사미술회 회원, 전국춘향미술대전 초대작가, 전북미술대전 초대작가로 활동하기도.
전북수채화협회 사무국장, 의인미전 초대작가, 운영위원의 역할을 튼실히 하면서 의원 한켠에 미술인들의 보금자리를 마련, 4년째 수갤러리 관장을 맡고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만나 치료를 하다 보면 구김살없는 세상을 한아름 꿈꾸게 됩니다. 천태만상의 구름이 산하의 풍경들을 살뜰하게 보듬을 때면 감성을 자극하는 메시지가 들리는 만큼 산으로, 바다로 배낭을 메고 스케치를 떠나곤 합니다.
빛의 흐름이 느껴지는 신비로움은 정감 있는 서정시 한 편, 물과 그림자의 합주로 완성되는 그림마다 작가의 영감과 버무려진 세상사가 깃든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 인고의 세월, 정박, 첫눈, 바람부는 날, 다가산이 보이는 풍경, 구이 들녘, 송광마을의 겨울, 동진강, 탑사의 아침 등 작품이 꿈결처럼 다가온다. 아침 햇살이 눌러앉으면 눈부신 고요, 이 푸르도록 시린 계곡에 아스라한 추억으로 묻어 본다.
“진료 접수를 하고 대기하면서 그림 한 점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환자들의 일상에 희락이 찾아오겠지요. 또 수갤러리는 전시공간이 부족한 작가들에게는 텃밭과 고랑이 되겠지요”
지난 2005년 3월 문을 연 수갤러리는 매달 한 번씩 개최한 초대전이 20여 회에 이를 정도로 성황을 이루면서 예술 작품을 접할 기회가 적은 일반 대중들에게 보다 친숙하게 다가갈 기회를 주고자 마련하고 있는 것.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일을 할 수 있어 얼마나 가슴 뿌듯한지 모르겠습니다. 젊은 시절 미대에 진학하기를 희망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구요. 그러나 의사가 된 후 조금 멀리 돌아서 결국 원점으로 회귀해 소박한 꿈을 이루게 됐습니다”
환자의 맥박을 짚듯이 정성스레 이어진 붓 터치에서 묻어나는 땀과 열정이 연분홍빛 철쭉꽃 같다.
눈부신 이 봄날, 희뿌연 매연과 황사에서 벗어나 겨우내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펴고 머리를 쉬게 하고 싶다면 천년 고찰 ‘춘마곡’에 내리는 꽃비를 떠올려 보시라.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들이 살아 있는 ‘생명의 노래’, ‘환희의 노래’ 되어 작은 울림으로 시시각각 스며들고 있다. ‘자진모리’ 격렬한 율동으로 변화무쌍한 유희가 끝나갈 무렵, 잃어버린 자아의 실마리를 찾았다.
“순환.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자연 현상들을 ‘순환’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생로병사, 흥망성쇠, 춘하추동 등 길항 관계들은 반 박자 쉬어가는 여유를 배우게 하면서 희망을 얘기하며, 한 박자 건너가는 마음을 통해 가슴에 쌓인 원한과 저린 기억마저도 저 멀리 몰아낼 수 있는 자신감으로 이어집니다”
마음 속 욕망을 한바탕 색채로 쏟아내면 내면 속 자유로움이 깃든다. 생놀이 덩실덩실, 함박 웃음 가득가득.
아련한 언덕 너머의 추억, 짙게 드러워진 밤, 황금빛 태양을 잔뜩 머금은 ‘섬진강 풍정’. 오롯이 솟구치는 세월의 파편들을 생각하면 잠시나마 치열하게 살고 있는 오늘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기쁨을 선사할 때란.
서두르지 않고 한숨 돌리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가슴 한 켠에 화초담 하나 쌓으며 굴뚝 하나 곁에 두고서 슬로시티로 살고 싶다. 조심조심 두 손 모아 인사를 올리니 비나리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다 가라 하네. 강물처럼 별빛처럼 흘러가라 하네. 글=전민일보 이종근기자, 사진=전민일보 백병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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