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그 아무 것도 없지만 영원할 것처럼 믿게 만드는 바램은 떨어지는 매화 꽃잎처럼 가끔 허무하기도 하지만 참으로 아름다울 뿐입니다. 때론 숭고한 신앙이 되고, 때론 촛불처럼 다가오는 법이니까요.
우리들은 꽃은 시들고 눈도 녹아 사라질 운명. 사람도, 사랑도 모두 떠나고 그 자리엔 언제나 외로운 추억만 남을 뿐. 오늘따라 먼저 떠나간 자들의 풍경과 추억만이 남아 애틋하게 다가오네요.
애로라지 연기 솔솔 피우는 굴뚝이 구만리 하늘에 계신 해님, 달님, 별님, 이제 막 닿는 순간 비로소 하늘 문이 열립니다.
창덕궁 장락문 앞에 우두커니 서보니 낙선재의 영역을 들여다보면 손에 잡힐 듯 그 풍경 생생함 이루다 형용할 수 없네요. 저 멀리 떨어진 연못 위를 가득 메운 연꽃들은 또 다른 상념을 만들기에 충분하질 않아서인가요, 가슴 속 심사를 도려내어 보는 흐뭇함이란.
그러나 낙선재는 국상을 당한 왕비와 후궁들이 상중에 거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물이니, 낙선이라는 이름과는 잘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상중의 왕후들이 거처하는 곳이기 때문에 법도에 따라 단청도 하지 않았다는 슬픈 사연을 곱씹어보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닌가요. 낙선재란 이름만 모순 덩어리가 아니랍니다. 그곳의 ‘오래도록 즐거움이 있다’는 장락문도 마찬가지이구요.
서양화가 이정웅(전주대학교 객원 교수)씨는 요즘 ‘영원한 생명의 시’를 통해 시간이 흐를수록 망각해가고 있는, 아니 피폐화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본질과 근본을 제시하는 무지개빛 희망을 한아름 선사하고 있는 작가랍니다. 자유와 평화, 기쁨으로 충만한 역동적 삶이 영원한 생명의 핵심인 만큼 시 구절이 되는 셈입니다.
전통과 현대, 문자와 회화가 적절히 버무려면서 어우렁더우렁.
특히 서양화적인 재료와 기법을 최대한 이용, 조형적이면서도 현대적, 감각적인 느낌으로 탄생하는 만큼 ‘서양화풍 현대적 문인화’라고나 할까요. 동양의 전통적 문인화의 느낌을 갖고 성경 구절, 또는 채근담, 고시 등의 문구를 인용, 언어와 문자화된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때문입니다.
대중매체와 하이테크 정보화 시대를 반영해 현실의 오브제, 그리고 색.면으로 점철되는 추상적인 내용들을 결합, 확실한 주제 의식을 갖고 만든 작품의 진정성과 가치성은 끝간데 모를 지경입니다.
“책의 단면을 오브제로 이용하는 것이 제 작업의 핵심이죠. 의도하지 않고 쌓아둔 책의 단면은 언제든지 다른 의도로 인해 변화할 수 있는 찰나의 이미지이며, 이 시대 문명의 한 코드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비정형의 구도와 생경한 기법 속에서 현대 사회와 문화의 한 단면을 발견한 셈이죠”
이전의 작업들과는 달리, 언어가 주는 직접적인 설명으로 좀더 구체화된 작업, 보다 더 이완된 느낌으로 살풋하게 자리합니다. 마치 시화처럼 말입니다. 작품 위에는 그림이, 밑에는 내용이 들어가며, 그 중간엔 책의 단면들이 회색으로 고즈넉하게 자리하구요. 바로 그 책을 여는 순간, 많은 내용들이 담뿍 쏟아져 나오면서 영원이 갈구해야 할 삶의 지렛대가 되지는 않을까요.
시나브로 이규보의 ‘어느 여름날에(夏日卽事)’로 흠뻑 빠져듭니다. ‘홑적삼에 삿자리 깔고 바람 드는 마루에 누웠다가/꾀꼬리 두세 소리에 잠을 깨었네/빽빽한 잎이 꽃을 가리어 봄 뒤에도 남았고/엷은 구름에 햇살이 새어나와 빗속에도 밝구려’. 제가 시인이라면 그 다음 내용은 아마도 ‘낮이 긴 여름인가. 태양도 졸다가 그만 지쳤는지 서산 너머로 뉘엿뉘엿 지고 있다. 어디에선가 등잔불빛 가물가물 새어나오니 구곡간장 죄다 찢어놓는구려’라고 읖조리릴 것 같네요.
작가는 나른한 이 봄날, 꽃술에 희망 소지 가득 매달고 마알간 하늘을 바라다보는 잠깐동안 만이라도 반드시 한 뼘의 여유를 가져보라고 은근히 채근합니다. 태양은 항상 우리 곁에 가까이 있어 가끔 존재를 가끔 잊은 채 살고 있지만 한순간 한순간 기억을 더듬어보면 즐거운 추억보다는 괴로운 기억이 더 많은 게 우리네 삶 같네요.
그래서 ‘연’이란 작품에 ‘자그마한 샛강 하나가 총총한 별에 의지하고, 잠자리 등 살붙이 생명들은 별빛을 배고 수초 아래서 곤히 잠을 자는 모습’을 담아본 것입니다.
모든 꽃들이 지는 날에도 영영 지지 않을, 영원한 생명의 시를 읊조리기 위해 오늘도 마음을 비운 채 책 속의 진리와 교훈을 찾으러 나 여기 서있습니다. 자, 지금부터 풍경 속 침묵의 소리에게 말을 걸어봅니다. 쉿! 전민일보 이종근기자.
1.작가의 말
책장 앞에 정리되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쌓아 놓은 책들의 풍경을 통해 옛 사람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다. 책이 갖고 있는 상징성을 최대한 활용, 시간과 공간을 담아내며, 여러 차례에 겹쳐 칠한 많은 선으로 화면을 확장하고 있다. 또 오브제를 통해 우리가 현실 속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환상의 공간을 꿈꾼다. 그러나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절대 공간이기도 한 그 속에서 울려 퍼지는 침묵의 소리, 가슴을 찡하게 울리면서 꽃이 되어 스멀스멀 내 곁에 다가온다. 영원한 생명의 시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은.
2.서양화가(미학미술사 전공) 홍현철씨의 평
작가의 작품은 다분히 서정적이며 교훈적이고 도덕적이다. 언어와 문자화된 이미지를 통해 현대인들의 삶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 내용이나 채근담, 고시로 동,서양의 작가들에게 비평했던 내용들을 다시금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갈구하게 만든다. 문자와 더불어 형상화된 연꽃잎, 소나무, 달, 항아리, 매화, 조류 등 흔하게 경험했을 법한 소재들을 자연스레 등장시키면서 친근감을 더해주지만 무언의 시위를 하는 듯 은유의 미학이 백미다.
3.박영택씨(경기대학교교수, 미술평론가)의 평
식민지시대 최고의 문장가로 알려진 이태준은 책은 꼭 '冊'이라고 써야 제격이라고 말했다. 죽간본의 형태에서 따온 이 상형문자는 책이 꿰고 있는 많은 이야기를 함축해서 전달한다. 한 권의 책에는 너무 많은 말들이 고여 있고 응고되어 있다. 책을 펼치면 행간에 머물러 있던 무수한 말들이 기립해 다가온다. 활자들이 기지개를 켜고 망막으로, 뇌 속으로 함성처럼 스며드는 것이다. 책을 덮으면 다시 말들은 문자꼴로 결박되어 고요하다. 책장에 꽂힌 책의 등에 적힌 책의 제목은 그 책 안에 가득할 말들을 연상시켜 준다. 유혹한다. 무수한 책들로 가득한 책장이나 서재는 헤아릴 수 없는 말, 문자들로 가득해 울울하고 침침하다. 책을 펼치는 행위는 그 말들을 환생시키는 일이다. 그런데 이정웅은 책을 펼칠 수 없게 봉한 후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책의 경계에서 책등을 향해 단호한 칼질을 해댄다. 책을 잘게 썰고 토막낸다. 책으로 회를 떠낸다. 책을 망실시키는 행위이자 가혹한 훼손이다. 펼칠 수 없는 책, 읽을 수 없는 책으로 만드는 일이고 문자들을 죄다 붙여버리거나 칼에 의해 지워놓은 꼴이다. 모든 페이지는 접착제로 인해 들러붙어버렸다. 그래서 펼칠 수 없다. 펼쳐지지 않는 책은 책이 아니라 사물, 오브제가 되었다. 그렇게 붙어버린 책은 불구다. 쓸모없는 책, 다시는 살아날 수 없는 말들, 문자들, 모든 이야기의 죽음, 행간의 침묵이고 언어의 봉인이다.
온갖 책들이 이정웅의 칼과 본드에 의해 무참히 해체되었다. 이제 한 권의 두툼한 책은 얇은 띠로 바뀌었다. 수직으로 내려 그은 칼에 의해 지층으로 굳은 책의 일부가 흩어졌다. 그것은 문맥을 의도적으로 뒤바꾸고 동일한 시간 아래 다양한 내용들을 깊이로 내려가 떠낸 자취가 되어 고착되었다.
그렇게 작가는 책을 자르고 분쇄했다. 오로지 얇은 띠로 남겨진 책의 잔해는 원래의 책이 지닌 내용을 파기한 체 종이의 체적, 오브제로 남겨진 것이다. 수직으로 내려가 깊게 자른 칼은 책의 신체를 절개하고 토막 낸다. 잔혹하다. 이제 책의 몸은 사라지고 파편화된 책의 일부분만 처연하게 뒹군다. 작가는 그 조각, 파편들을 다시 추스려 화면 위에 부착했다. 콜라주 했다. 길쭉하고 약간의 두께를 지닌 그 조각들을 연결해 정물화나 초충도, 사군자 등을 연상시키는 그림을 그렸다. 부착했다. 식물이미지와 새 이미지가 두드러지게 자리한다. 종이로 그림을 그리고, 종이를 집적해 일종의 부조, 입체를 만들었다. 이 오브제 회화는 무척 촉각적이다. 꽃과 나무, 풀과 새가 함께 그려, 부착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종이, 책의 단면들이 수평으로 자리하면서 만든 이미지, 흔적이다.
작가는 캔버스 화면에 붓으로 밑그림을 그린 후 그 위에 종이/책을 붙였다. 제각기 다른 길이와 두께, 드문드문 비치는 색상, 종이의 재질, 오래되고 누렇게 빛바랜 종이의 상태들이 물감을 대신해 형상을 안긴다. 다양한 표정을 만든다. 붓, 모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그 필력이 고스란히, 더 생생하게 연상되도록 종이를 콜라주하고 있다. 그가 붙인 종이, 책의 단면에서 소리가 난다. 획의 소리가 난다. 그는 전통문인화나 화조화를 새삼 책으로, 종이로 재현한다. 나로서는 정물화 보다는 사군자나 화조화 같은 것이 좋다. 앞의 것이 지나치게 장식적이고 작위성이 강하다면 후자는 필의 맛과 호흡이 느껴지고 더불어 가락이 있다. 흡사 남도 판소리 같은 가락 말이다.
분명 종이/책이 자연을 떠올려주고 식물과 나무로 환생했다. 작가는 책의 단면을 부착한 후 그 주변은 종이를 주물러 만든 종이죽(모든 이야기를 뒤섞고 혼합해버린)을 부착해 채워나갔다. 또는 아크릴과 핸디코트를 섞어서 칠을 하거나 색모래와 모래, 접착제 등을 혼합해 부착했다. 그에 따라 촉각적인 화면이 도포되었다. 그런 후에 그라인더로 단호하게 갈아내고 부분적으로 종이 결을 깍아 내어 속도감, 시간성, 요철효과 등을 안긴다. 그는 칼과 그라인더, 접착제로 그림을, 조각을 하고 있다. 그라인더로 긁고 손으로 치고 모필로 밑그림을 그리는 이 모든 행위의 저간에는 사군자를 치던 문인들의 제스처와 호흡, 운필의 리듬이 느껴진다. 기운생동이 감촉된다. 작가는 말하기를 오랫동안 문인화와 화조화에 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며 이를 응용한 작업을 시도했다고 말한다. 아마도 작가가 자라고 수학한 전주의 문화적 배경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작가는 버려진 책들, 헌책들을 수집했다. 그렇게 사라지기 직전의 책들을 모아 나무와 풀, 꽃과 새로 환생시켰다. 버려진 책에 생명력을 안겼다. 색상도 재질도 느낌도 다른 책의 단면들이 모여 하나의 세계를 창출했다. 옛 책과 지금의 책이 한 화면에 공존하고 여러 이야기들이 서로 뒤섞이고 서로 다른 문맥들이 조화를 이룬다. 대화를 나눈다. 그래서인지 그림 속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한 쌍의 새들은 바로 책들이 서로 대화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이 그림에서 보는 것은 분명 책이 아니다. 독특한 재료체험을 만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책의 단면이다. 책의 결이다. 무수한 시간, 이야기가 혼재된 결, 깊이가 부착되어 있고 그것이 이미지를 성형한다. 또한 칼이 빠르고 신속하게, 깊이 있게 베고 지나간 상처를 만난다. 칼에 의해 잘리고 절개된 아픔, 그 상처가 문인적 세계관을 표상하는 사군자로 홀연 환생했다. 아름다운 서정적 풍경으로 돌변했다. 기이한 모순이다. 이정웅의 칼질에 의해 잘려진 책의 단면들은 화면위에서 춤을 추듯, 가락처럼, 운율처럼 진동한다. 마냥 너울거린다. 활기차고 부산스럽다. 어울러 부드럽고 강하게 뻗어나가는 선들, 파스텔 톤의 가라앉은 색상, 익숙한 전통화의 도상들, 화면을 손으로 더듬고 싶은 촉각성, 요철효과를 지닌 평면의 화면이 흥미롭고 신선하다. 책이란 물질을 가공해 그림을 그려나가는 발상, 방법론이 더없이 재미있는 것이다.
4. 작품 소장처
국립현대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정읍검찰청사, 한국전력 전주지사 등
5.작가가 걸어온 길
전주 출신
전주대 미술학과, 동 대학원 미술학과 졸업
개인전 13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양화부문 특선 2회, 입선 3회
전라북도미술대전 대상, 우수상, 특선 1회, 입선 1회
중앙미술대전, 미술세계 대상전, 전국춘향미술대전 특,입선 수회
반영미술상 수상
전북청년미술상 수상
한무리미술상 수상
(현) 한국미술협회, 투사와 포착, SALE, Quarter, 지붕전, 색깔로 만나는 사람들 회원, 전북미술대전 초대작가
(현) 전북미술협회 청년분과위원장, 아트 프라이스 전북지역 편집장, 전주대학교 도시환경 미술학과 객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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